<2부> 육지로, 육지로 ②동해에서 부르는 망향가

   
 
   속초시에 조성된 탐라인의 꿈동산  
 

# 제주사람이라고 괄시 없어

예부터 후덕한 인심으로 잘 알려진 강원도. 제주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나 보다. 물론 생계를 위해 몰려든 낯선 이방인들의 이주를 두 팔 벌려 환영할 수야 없었겠지만 매섭게 내치지도 않았다.

한국전쟁 이후 강원도 해안지역으로 이주한 제주인들은 숙소를 마련하지 못해 천막생활을 하곤 했지만 커다란 분쟁이나 갈등 없이 곧 지역에 동화됐다. 해녀들의 대거 이주한 지역이면 어디서나 어업분쟁이 있었기 마련이다. 제주인이라 괄시하고, 낯선 제주어를 쓰는 것만으로도 차별 받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강원도 해안 지역에 정착한 제주인들은 일정의 어업료만 지불하면 자유롭게 물질이 가능했고, 넘쳐나는 해산물을 처치하기 위해 오히려 해녀를 불러모았다.

또 한시의 쉼 없이 일하는 부지런한 제주인의 모습은 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오히려 호감까지 얹어주었다.

황태훈씨(74·김녕)는 “당시 홀로 건너온 해녀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강원도 총각들이 오징어를 부러 갖다주기도 했다”며 “또 제주남자들 역시 지역민조차 마다했던 인분 사업 등을 하면서 지금까지 ‘제주인=근면함’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말했다.

# 끈끈한 제주 공동체

아무리 인정 많고 따뜻한들 자기 집, 자기고향만 같을 수는 없다. 더욱이 오로지 생계를 위해 흘러 들어온 이들에게 낯선 땅에서의 삶은 모든 것이 설움이고 고됨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동향이라는 이유만으로 제주인들이 하나로 뭉쳐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더욱이 모두가 ‘괸당’이고, 한 식구인 제주만의 끈끈한 공동체성은 제주 섬 밖에서 더욱 힘을 발휘한다.
현재는 육지식 결혼풍습을 따르고 있지만 예전에는 종종 제주에서처럼 가문잔치를 하기도 했다. 해녀들은 작업도 제쳐두고 잔칫집으로 몰려들어 일손을 도왔다. 상을 당할 때도 마찬가지다.

황태훈씨는 “집안 일이 2∼3일씩 이어질 때면 조를 짜서 번갈아 가며 물질을 했어. 인근 지역 제주인들은 다 달려왔지. 똘똘 잘 뭉쳐 주변에서 제주인들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몰라”며 제주의 수눌음을 자랑스레 이야기했다.

이처럼 끈끈한 결속력은 친목회, 도민회 운영으로 이어졌다. 1960년대 강원도 영북지구에 거주하는 제주출신만 50여가구가 되자 곧 친목회를 창립, 발족했다. 현재는 속초·양양·고성·거진·대진 일원을 아우른 영북제주도민연합회가 운영되고 있다.

제7대 회장인 황태훈씨는 “강원도 지역에는 그다지 사람이 많지 않기에 한 사람이 5∼10년씩 도민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며 “특히 2·3세대로 갈수록 제주인이라는 인식이 희박해지면서 점점 제주도민회를 책임질 사람도 없어지고 있다”고 아쉬움을 털어냈다.

# 고향을 그리는 탐라인의 꿈 동산

“시간이 지나면 고향에 돌아가려고 했다”. 이토록 서글픈 말이 또 있을까. 세월의 풍상만큼이나 깊게 패인 주름과 성성한 백발의 노인, 그의 짧은 말 한마디가 깊게 폐부를 찌른다.
가난 때문에, 생계를 위해 떠나오던 이들에게 고향은 곧 돌아가야 할 곳이었다. 그러나 맨 몸 하나로 시작한 타향살이가 한순간 나아질리 없다. 억척스럽게 살아온 세월, 어느 날 뒤돌아보니 시간은 저만치 가버렸고, 고향은 점점 멀어져갔다. 

더욱이 강원지역 제주인들은 1970∼80년부터 발전하기 시작한 제주의 경제수준이 이제는 강원지역을 훌쩍 뛰어넘으면서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게 더욱 어려워졌다고 했다.
이처럼 수 만가지 사연으로 수륙 이천리 떨어진 타지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한가지 큰 고민이 있었다. 죽어서 만이라도 고향에 묻히고 싶었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을 일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강원지역 제주인들이 조성한 게 바로 ‘탐라인의 꿈동산’이다. ‘탐라인의 꿈동산’은 강원지역 제주인들이 묻힌 공동묘지다.

제주인들은 1984년 십시일반 돈을 갹출해 250만원을 모금했고, 재일본 제주인의 성금까지 모아 속초시내 3000여평의 야산을 구입해 묘지를 조성했다. 1950∼60년대 건너왔던 이들이 하나둘 운명을 달리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덕분에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타지에서 생을 마감한 제주인들은 탐라인의 꿈동산에 자신의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어려웠던 시절 함께 울고 웃으며 고생했던 고향 제주사람들을 벗삼은 채 죽어서도 잊지 못한 고향을 되새길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현재 영북제주도민연합회가 관리·운영하는 탐라인의 꿈동산에는 42구가 묻혀있다. 동해가 내다보이는 탐라인의 꿈동산. 고향 제주와 닮은 양지 바른 그곳에서 죽어서도 잊지 못할 망향의 한을 삭힐 수 있기를 소망해보는 그들이다.

 

<인터뷰 = 속초에 뿌린 내린 백성호 할아버지>

"이젠 가고 싶어도 제주가 너무 발전해 갈수가 없어"

   
  백성호 할아버지
   
 
“전국에서 최고로 못살았지. 농사지을 만한 변변한 땅도 없는 데다 먹을 물조차 없던 곳이 제주였어”

백성호씨(78·대정 출신)가 기억하는 1950년대 제주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말 그대로 먹을 물조차 없는 곳이었다. 식수를 얻는데 만도 반나절이 걸리던 그런 시절이었다. 더욱이 해방과 함께 곧바로 불어닥친 피의 광풍이 백씨가 가진 제주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다.

그는 4·3당시 무려 2번이나 총살대에 섰으나 우여곡절 끝에 목숨만은 건졌다고 했다.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던 그는 “옛날을 생각하면 다시는 제주에 가고 싶지 않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나 곧 쏟아지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숨길 수가 없었다. 이미 속초에서 번듯하게 자리잡았지만 고향은 고향이다. “이젠 가고 싶어도 제주가 너무 발전해서 갈 수가 없어”.

백씨가 떠나올 1950년대만 해도 제주에서 가장 좋은 땅이라고 해봤자 평당 50원이 채 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이후 제주의 성장은 정말 괄목할만하다. 오히려 강원도에 사는 제주인들은 관광산업으로 제주가 훨씬 발전되고 살기 좋아졌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먼 타지에서도 제주의 소식을 속속들이 꿰고 있는 백씨. 제주가 특별자치도가 되고, 제주항공도 생겼다며 고향에 대한 자랑스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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