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민일보를 말하면서 빠질 수 없는 것이 4·3이다. 1990년 6월 참언론의 깃발을 내걸고 창간한 이후 기획물 ‘4·3은 말한다’를 통해 땅속에 묻혀있던 역사의 실체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냈다. 이 같은 제민일보의 노력은 4·3특별법 제정과 4·3진상조사보고서 작성의 모태가 됐다. 앞으로도 4·3의 진실복원을 위한 제민일보의 발걸음은 계속될 것이다.

   
 
   
 
▲뗄래야 뗄 수 없는 운명
제민일보 ‘4·3은 말한다’를 말하기 위해서는 몇 해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88년 도내 유일의 일간지였던 제주신문은 4·3발발 40주년을 맞아 4·3특별취재반(반장 양조훈)을 구성, 1년여간의 준비 끝에 1989년 4월3일 기획물 ‘4·3의 증언’을 연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해 참언론 운동이 벌어졌고, 이듬해 1월 제주신문 사주가 참언론 운동을 벌이던 기자들을 집단 해고하면서 4·3취재반의 ‘4·3의 증언’도 자연스럽게 중단됐다.
이를 부활시킨 것이 제주신문 폐간 후 해직기자들이 중심이 돼 창간한 제민일보다.

제민일보는 4·3취재반(반장 양조훈)을 재구성, 1990년 6월 창간과 함께 ‘4·3은 말한다’라는 제목으로 4·3연재를 시작했다. ‘4·3은 말한다’ 연재뿐 아니라 4·3진상규명 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수행하면서 외국언론들의 취재대상이 되기도 했다.

1993년에는 ‘한국기자상’을 수상, 전국 언론계의 화제가 됐다. 이듬해인 1994년에는 한국언론연구원이 ‘4·3은 말한다’기획보도를 탐사보도의 전형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제민일보는 창간 후 지금까지 4·3과 관련해 수많은 특종을 발굴 보도했다.

1991년 4월3일을 맞아 “1949년 3월 현재 인명피해 1만5000명, 80%이상 진압군에 의해 희생됐다”는 내용의 비밀문서를 발굴보도, 희생규모와 사건 성격의 일단을 밝혀냈다.

이듬해 4월에는 구좌읍 다랑쉬굴에서 유골 11구를 발굴보도, 4·3의 실체를 세상에 알리더니, 1996년 4월2일자에는 ‘4·3학살 주도했던 책임자 아편중독자였다’는 보도를 통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여론에 불을 지폈다.

4·3계엄령은 불법이었다(1997년 4월1일자) 보도와 4·3을 폭동으로 서술한 국정교과서의 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뒤 끊임없이 정정을 요구, 정부당국의 역사인식을 바꿔놓기도 했다.

▲「4·3은 말한다」발간
1994년 3월10일에는 그간 신문지면에 연재됐던 ‘4·3은 말한다’ 내용을 일부 다듬고 보완해 「4·3은 말한다」(전예원 간) 2권의 책을 펴냈다.
이후 3권이 더 발간돼 지금까지 출간된 「4·3은 말한다」는 총 5권이다.

5권 발행 이후 신문에는 연재가 됐지만 아직까지 책으로 묶이지 않은 내용도 두 권 분량이 돼 「4·3은 말한다」 6·7권으로 출판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제주출신 재일동포 2세인 김중명·문순실씨 등은 이를 「제주도 4·3사건」(신간사 간)이라는 제목으로 제6권까지 일본어로 번역 출판하기도 했다.

이 같은 제민일보의 4·3진상규명 노력은 이후 4·3특별법 제정(1999년)과 정부의 4·3진상조사보고서(2003년) 채택 등에 모태가 됐다.

특히 정부가 채택한 4·3보고서는 제민일보 ‘4·3은 말한다’기획보도의 결정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3취재반 출신 양조훈·김종민씨가 기획단에 참여, ‘4·3은 말한다’를 근간으로 보고서 작성을 주도, 정부 공식기록물로 세상 앞에 당당히 내놓은 것이다.

▲4·3의 완전한 진실복원을 향해
4·3보고서가 채택되고 정부의 공식사과가 이뤄졌지만 ‘진실복원’이 완벽하게 이뤄진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주4·3은 여전히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다.

4·3보고서 채택 이듬해인 2004년 4월에 개최한 ‘4·3평화 국제 마라톤대회’는 4·3의 소중한 교훈을 바로 세우기 위한 제민일보의 새로운 작업이기도 하다.

당시 제민일보는 ‘4·3 보도전’을 통해 과거의 아픔을 딛고 제주를 인권의 상징이자 평화의 섬으로 자리 매김하는 작은 시도를 펼쳤다.

1990년 6월 창간 이후부터 4·3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운명으로 얽힌 제민일보이기에 앞으로의 4·3의 완벽한 진실복원을 향해 당당하게 발걸음을 내디딜 것이다.<좌용철 기자>

◆인터뷰=양조훈 전 제민일보 4·3취재반장

   
 
   
 
“단일 사건을 놓고 10년 넘게 취재반을 운영한 것은 대한민국 언론사상 초유의 일입니다. 역사인식을 갖고, 진실을 추구하려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양조훈 4·3중앙위원회 수석전문위원(전 제민일보 편집국장)은 언론의 사명의식을 무엇보다 강조했다.

양 위원은 제주신문·제민일보에서 10여년간 4·3취재반장으로 4·3의 진실을 밝혀왔고, 4·3특별법 연대회의 공동대표 등을 맡아 특별법 제정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4·3취재반 결성배경을 묻는 질문에 “당시 젊은 기자들 사이에는 언론의 정도(正道)를 위해 4·3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인식이 형성돼 있었다”며 “하지만 당시에는 4·3과 연관되면 인생을 망치는 것이라 여길 정도였다. 취재를 하면서도 지금과 같은 세상이 올 줄은 정말 몰랐다”고 말했다.

그는 “4·3이 워낙 예민한 문제여서 취재 못지 않게 비중을 뒀던 것이 검증이었다”며 “456차례 연재를 하면서 큰 항의 하나 없었던 것은 ‘돌다리도 두드려 건너는 심정’으로 취재하고 검증했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양 위원은 “4·3취재를 10년 넘게 하면서 수많은 고비가 있었지만 4·3취재반원들의 치열한 역사의식과 기자정신, 열정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며 “4·3특별법 제정과 정부 공식보고서가 나오게 돼 감회가 새롭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그는 특히 “‘4·3은 말한다’를 통해 한국기자상 수상과 한국언론연구원으로부터의 탐사보도의 전형으로 평가받은 일 등은 대한민국 언론계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며 4·3취재반 활동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후배기자들에게는 “언론은 호흡을 길게 해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며 “기자 개개인도 투철한 역사적 소명의식과 열정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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