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성문이라도 옛 모습대로 복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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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의 전통문화는 끈덕지다. 그것은 굴곡 많은 역사에도 불구, 미역처럼 줄기차게 살아온 제주인의 삶과 닮아 있다. 돌하르방을 보자. 다공질 현무암을 다듬은 돌하르방은 인고와 괴로움을 딛고 비바람 속에도 꿋꿋이 살아온 제주인의 얼굴이다. 제주목의 돌하르방은 비뚤어지게 쓴 감투와 뭉툭한 눈망울에서 무인의 호방한 위업을 엿볼 수 있다. 정감 넘치는 대정현의 돌하르방, 날카롭되 단정한 인상의 정의현의 돌하르방 역시 제주인의 올곧은 정신의 맥을 잇고 있다. |
△돌하르방, 제주인을 닮은 민속문화=돌하르방은 정확의 누구에 의해 몇 기가 세워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1754년(영조 30년) 목사 김몽규(金夢奎)에 의해 세워졌다는 기록은 나와 있다.
돌하르방은 제주목·정의현·대정현 등 현청소재지의 성문 앞에 나란히 세워졌던 석상이다. 이 석상은 수호신적 기능과 주술적·위치표시적 기능을 해왔다.
‘돌하르방’이란 명칭으로 통용된 것은 지난 1971년 8월26일 제주도문화재위원회에서 민속자료(제2호)로 지정하면서 부터다.
그 전에는 벅수머리, 우성목, 무성목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웠다. 돌하르방은 제주·정의·대정 세 곳의 동·서·남 세문 입구에 길 양옆으로 쌍쌍이 세워졌다. 현재 남아 있는 돌하르방은 47기. 제주시 21기, 정의현 12기, 대정현 12기다.
정의현, 대정현의 돌하르방은 제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제주시의 2기는 국립민속박물관으로, 나머지 19기는 제주대·제주공항공사·제주시청·삼성혈·목석원·제주KBS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역사 속에 묻힌 돌하르방=제주시 돌하르방들이 집단으로 원위치를 벗어난 것에 대한 사유나 기록은 없다. 다만 1960년대 제주시 도로포장공사로 돌하르방이 집단 이전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어쨌든 1960년대 제주시 돌하르방은 1기도 남김없이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졌다. 작은 유물도 아니고 거대한 석상들이 원위치를 잃어버렸다.
그런 일들이 국립민속박물관, 대학, 관청 등 국가기관·지방기관에서 추진됐다. 제주시 돌하르방은 해당 기관들이 돌하르방을 이전한 7년 뒤에야 대정현·정의현 돌하르방과 함께 제주도문화재로 지정됐다.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된 돌하르방 2기는 도문화재가 아닌, 국가유물로 지정돼 있다. 당시 돌하르방의 운반책이었던 한 원로 민속학자는 “제주시 돌하르방 몸뚱이가 땅에 묻히거나, 돌하르방에 타이어가 껴 있었다”며 제주의 허술한 돌하르방 관리책을 성토했다.
제주시 돌하르방의 수난은 원위치를 벗어나면서 더욱 가혹했다. 도내 관공서에 소장된 제주시 돌하르방들은 문화재로 지정됐을 뿐, 훼손과 왜곡된 시설로 수난의 악순환을 겪고 있다.
△돌하르방, 원위치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제주시 돌하르방들의 기구한 운명은 대부분 국가기관에 의해 벌어졌다. 제주시 돌하르방이 이전된 당시 전황에 대한 보고서, 자료 1장 없다.
제주향토사학자인 강창언씨는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 속에 묻힌 돌하르방의 기막힌 사연을 보면, 오늘의 제주 민속문화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다”며 개탄했다.
제주시 돌하르방들이 원위치를 떠나 아스콘에 묻히고, 트럭에 채이고, 허리가 부러지는 수난에 대해 반성하고 돌하르방을 제자리로 복원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은 전혀 무리가 아니다.
93년 민속학자 김영돈의 언급은 아직도 유효하다. “문화재 보호의 제일원칙은 현장불변경원칙이다. 소중한 문화재는 그 자리에 고스란히 두는 것이 타당하다. 그래야 제 기능을 먼 후세에까지 남길 수 있고, 살아 있는 교육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제주시 경우, 한 성문만이라도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고, 돌하르방도 원위치 복원을 심각히 헤아려 봐야 한다.”
※이 연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