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먹는 물고기 중에 멸치는 가장 작은 어류일 것이다. 무리를 지어사는 이 멸치는 힘이 없고 군중심리에 휩쓸리기 쉬운데다 작은 불빛을 따라 모여드는 습성 때문에 떼거리로 잡히기 일쑤다. 생명력은 강해서 잡힌 후에도 한참을 파들거린다. 너무 작아 회를 쳐먹기도 애처로운 이 놈들에게도 가슴이 있는데 제주사람들은 그것을 '멜가슴'이라 부른다. 성품이 힘없는 서민들을 닮아서 이 말은 곧잘 속이 넓지 못하다는 비아냥거림으로 쓰이지만 그 속에는 또한 깊은 동정과 연민의 정이 담겨있게 마련이다.

12일 오후 제주시청 회의실에서는 설날 대목을 대비한 이른바 '물가대책회의'가 열렸다. 좌석의 중앙에는 제주시청의 고위관계자가 앉았고 그 오른쪽에는 경제범죄를 다스리는 제주경찰서의 수사계장, 왼쪽에는 제주세무서장이 배석을 차지했다. 양옆으로 농·축협의 관계자, 음식점 주인, 이발소 주인, 미용실 주인들이 앉아 있다.

중앙에 앉은 고위 관계자는 점잖을 한껏 빼며 물가안정을 위해 협조해 줄 것을 당부해 물가인상 목표수치를 제시했다. 그 대책으로 과다한 요금이나 음식값을 인상한 업소에 대해서는 엄격한 단속과 세무조사를 할 방침이라는 엄포를 잊지 않는다.

이에 호응하여 축협의 관계자는 설날이 다가오면 오히려 가격을 인하할 방침이라고 한다. 농협의 관계자는 최근에 개설한 대형 공판장에서 10∼20% 정도 바겐세일할 계획이라고 한다. 유흥업소 주인은 경기가 침체돼 그렇지 않아도 장사가 안되는데 어떻게 술값을 올려받겠느냐는 푸념이고 음식점 주인도 음식값을 올릴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회의의 결과대로라면 올해 인상 한도를 지키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물가가 내릴 판이다. 시청의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에도 물가는 1.2%밖에 인상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니 수년째 물가는 안정된 모양이다.

그런데 왜 요즘 들어 시장에 가면 돈 몇 만원으로는 반찬거리 몇 가지 사지를 못하는 것일까. 또 어쩌다 한번 서울출장을 하려고 공항에 갔을 때 터무니없이 올라버린 비행기값 때문에 망연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면 이 자리에는 정말 있어야 할 사람들이 빠져버린 것이 아닐까.
감귤출하철만 되면 만만치 않는 운송료로 농민들의 애를 태우는 운송업자들, 수천억원의 안정기금을 쌓아놓고도 국제원유가가 들썩만 하면 서너 차례씩 기름값을 올려버리는 정부관계자, 비행기값을 몇 달만에 절반이나 올려놓아 시민들의 반발을 사고, 공정 거래 위에 제소까지 당해도 눈 한번 꿈쩍않는 대형 항공사 관계자들.

그러고 보면 이날 회의는 고래나 상어같은 대어들이 빠져버린 멜들의 대책회의가 아닌가. 뭔가 분통을 터뜨리고 싶은 멜가슴의 참석자들이 끝내 항변했다. "거 대책회의 할 때마다 세무조사니 뭐니 꼭 겁을 줘야겠습니까?" 멜가슴치고는 용기있는 한마디였다. <고대경·경제부장대우><<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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