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평화 르네상스 2. 한국사회와 다크 투어리즘 제주편 <18>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일대

4·3을 기억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불칸낭(불타버린 나무).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4·3당시 선흘 리가 초토화되면서 같이 탔지만, 지금껏 살아있는 나무다. 생명은 질겼다. 모두 타버려 생명을 잃어버린 줄 알았던 나무의 한쪽에서 새싹이 돋았다. 다 타버려 죽어버린 굽이에서는 어디선가 날아온 수종이 다른 나무의 씨가 새싹을 틔워 수십년을 같이 살았다. 불칸낭과 함께 선흘리 일대는 제주4·3 역사의 축소판이다. 처절한 아픔과 비극적인 이야기가 곳곳에 잠복해 있다. 제주작가회의가 이 일대를 답사했다. 목시물굴, 밴뱅듸굴, 불칸낭, 북촌 너븐숭이 4·3기념관을 잇는 기행길에 동행했다.

#4·3 역사의 축소판

   
 
동백숲에 들었다. 선흘 곶자왈 자리. 동백꽃이 무더기로 졌다. 1차 기행지인 목시물굴이 동백숲에 바짝 엎드린 채였다. 가까이 다가서니 냉기가 엄습했다. 4·3당시 수백여명의 선흘리 주민들이 굴속으로 숨어들었던 곳이다. 1948년 11월21일 선흘리 일대가 토벌대에 의해 불탄 이후 선흘 주민들은 선흘곶 일대의 곶자왈과 동굴을 은신처로 삼았다. 하지만 선흘곶 굴들이 발각되면서 많은 희생을 치렀다.

목시물굴에도 200여명 이상의 선흘 주민들이 은신해 있었다. 주민들은 토벌대에 의해 목시물굴에서 죽임을 당했거나, 함덕, 억수동에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지금도 굴속에는 피신생활 당시 사용했던 그릇, 숟가락, 호롱불, 고무신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현재 굴은 보호차원에서 철책으로 봉쇄돼 있다.

굴 외부 서쪽 입구에는 주민들이 생활했던 움막터 주춧돌이 원형으로 남아 있다. 이와같은 움막터는 반경 20여m 에 30여개가 산재해 있다.

벤뱅듸굴 역시 선흘리 초토화 이후 선흘리민들이 은신했다가 희생당한 곳이다. 1948년 11월21일 선흘리 일대가 토벌대에 의해 불탔다. 이후 해변마을로 피난가지 못한 주민들이 인근 선흘곶의 동굴을 은신처로 삼았다. 특히 웃밤오름 동남쪽에 위치한 벤뱅듸굴에는 선흘2구 일대 주민들이 집단으로 피해 있었다. 하지만 굴이 발각되면서 많은 주민들이 희생됐다.

선흘리가 초토화되면서 마을 가옥들도 몇 채만 놔두고 모두 전소됐다. '불칸낭'도 그때 화를 입은 나무다. 60여년 흐른 지금도 불칸낭은 질긴 생명력으로 비극의 역사를 온몸으로 증언해주고 있다. 강덕환 시인은 시 '불칸낭'에서 "집이건, 연자방아건 깡그리 무너지고 / 동굴속으로 숨어든 사람들마저 다시 못 올 길 떠난 자리에/ 방홧불에 데인 상처 아물지 못해/ 옹이로 슴배인 마을의 허한 터에 서서 끝내 살아간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밖에 선흘리는 초토화과정을 겪으며 당목(堂木)도 잃어버렸다. 선흘리민들은 매년 정초에 마을당(堂)인 일뤠당에 모여 굿도 하고 거리굿도 했었는데 초토화의 와중에 당목이 불타고 당도 훼손됐다.

선흘리 낙선동의 4·3은 지금도 그때 그 자리에 남아 있다. 당시 쌓은 성담과 그것을 쌓은 사람들이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검은 색깔의 성담위로 송악 담쟁이가 아픈 역사를 위로하듯 무성하게 덮여 있다.

#"길 잃으니, 역사가 보였다"

벤뱅듸굴을 빠져나오다가 기행자들이 길을 잃었다. 출구는 보이지 않고 천지가 숲길로 덮여 방위를 분간할 수조차 없었다. 기행자들은 곳곳에 연못과 마소 똥이 깔린 틈을 피했으나,  출구를 찾았나 싶다가 막다른 길을 만날 때면 낭패감에 사로잡혔다. 가시덤불에 옷을 찢기고, 연못에 신발이 빠졌다. 1시간여 넘게 벤뱅듸굴 주변만 맴돈 셈이다.

누군가 "무리지어 다니길 잘했다. 만약 혼자였으면…가뜩이나 사방이 굴인데, 굴에 갇혔으면…" 하며 말끝을 흐렸다. 공포로 오금이 저렸던 것이다. 또 누군가는 "4·3 영령들 때문에 길을 잃었다"고 말했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댔다. "벤뱅듸굴에서 길을 잃으니, 4·3당시 토벌대를 피해 산으로, 굴로 숨어들었던 주민들의 절박함이 마음에 와 닿더라"는  얘기도 빼먹지 않았다.

앞서  목시물굴에서 문학기행 참가자들을 위해 작은 위령제가 열렸다. 기행자들은 준비한 과일과 술과 떡을 돗자리 위에 가지런히 얹었다. 목시물굴에서 희생된 영혼들을 위한 위령제사, 군병놀이, 진혼무, 노래공연이  펼쳐졌다.

이날 문학기행의 종착지인 북촌 너븐숭이 4·3기념관에서는 평화의 꽃 심기, 기념식수가 있었다. 청소년 참가자와 작가 일동은 북촌바다에서 몰아쳐오는 맵찬 바람에도 북촌 너븐숭이 일대 애기무덤 주변에 꽃과 나무를 심어 어린 넋들을 위무했다. 참가자들은 목시물굴, 밴뱅듸굴, 불칸낭, 북촌 너븐숭이 4·3기념관을 잇는 이번 기행을 통해
4·3 역사의 진실과 그 진실이 우리 시대에 던지는 의미를 다시 한번 나눴다.

문무병 시인은 이날 '4·3영령들에게 드리는 글'?을 빌어 우리 세대들이 이 땅의 진정한 화해와 상생의 좌표를 찾기를 희망했다.

"오늘, 목시물굴, 산지사방에 번성꽃,환생꽃, 생명꽃 따러 갔더니/ 동백꽃 한꺼번에 무더기로 진 자리에 죽음의 꽃잔치 끝나고 죽음의 재판과 훌훌 털고 떠난 들녂 …/ 아, 몸천을 잃고 허공을 떠도는 설운 누이여/ 없는 몸은 짚으로 만들고, 없어진 다린 목발로 잇고/ 없는 심장, 인공 폐 달아 사람으로 살 길 열어드리오니 저승 상마을에 가 나비로 환생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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