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평화 르네상스 제주 2. 한국사회와 다크 투어리즘 제주편 <19>서부지역 유적지.
| 4·3 유적지는 제주도민들이 몸소 겪은 피어린 역사의 흔적이자, 현장에 있는 박물관이다. 4·3 유적들은 그러나 60여년이 흐르면서 훼손되고 잊혀지고 있다. 비계획적이고 몰역사적인 개발로 인해 4·3의 정신과 진실이 자꾸 묻히고 있다. 제주편의 종착점을 서부지역으로 잡았다. 하귀리 영모원을 시작으로, 봉성리 자리왓, 월령리 무명천 할머니 생가, 동광리 무등이왓과 삼밭구석, 동광리 헛묘, 동광리 큰넓궤 등 기행코스를 통해 4·3유적의 제도적 보호는 물론, 평화 프로그램과 평화 투어리즘의 가능성을 타진해본다. |
#주민 십시일반으로 성금 모아 세운 '역사'
제주시 애월읍 하귀1리 소재의 영모원(英慕園). 이곳은 하귀리민들이 하귀발전협의회를 중심으로 일제강점기 항일운동가와 4·3희생자, 4·3 및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 희생된 호국영령들을 한 곳에 모셔 추모하기로 하고 3년여 준비 끝에 2003년 5월 27일 제막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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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덕면 동광리 삼밭구석. 옛 마을 팽나무와 위령비. | ||
4·3당시 하귀리는 하귀중학원을 계승한 단국중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죽음, 가문동 원뱅듸 학살사건, 개수동 진수리 학살사건, 외도지서 장작사건, 비학동산 학살사건, 붉은 질학살사건, 하귀초등학교 '눈 감으라' 사건, 외도지서 서쪽밭 학살사건 등 토벌대의 무도한 진압으로 온갖 사건을 겪으며 320여명이 희생됐다.
애월읍 봉성리 소재의 자리왓. 자리왓 중앙에는 좌우상하 균형이 잘 잡힌 팽나무가 4·3 당시의 비극과 폐허가 된 대지의 무상함을 전해주듯 서 있다.
자리왓은 1948년 5월 10일 단독선거 반대를 위해 주민이 새별오름 앞에 있는 '자굴왓 굴'로 피신했다가 다음날 마을로 돌아오는 과정에 4·3의 수렁으로 들어가게 됐다. 토벌대의 작전이 시작되면서 자리왓에도 소개명령이 내려졌는데, 그 와중에 토벌대의 초토화작전으로 마을은 폐허로 변했다. 주민들은 후에 마을에 와보니, 잿더미가 된 자리왓의 대지는 벌겋게 달구어진 붉은 땅이었다고 전했다.
애월읍 농협봉성지점 인근, 팽나무가 있는 곳이 4·3당시 마을의 중심지였던 왕돌거리이고, 잃어버린 마을 표석도 세워져있다. 다음은 표석 내용의 일부분이다.
" 주민들은 봉성리 입구 신명동에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한 이후 자리왓 등으로 전혀 돌아오지 않았으니, 이곳을 지나는 길손들이여,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라. 저 바람에 서걱대는 대숲이 있던 집터와 밭담사이로 자그맣게 남아있는 올레, 그리고 마을의 역사과 더불어 살아온 저 팽나무를. 서러운 옛 이야기가 들이지 않는가."
#4·3 유적지는 현장 박물관
온 마을이 선인장 천국인 한림읍 월령리 소재의 무명천 할머니 생가. 무명천 할머니, 본명 진아영 할머니는 4·3이 일어난 다음해인 1949년 1월 35살의 나이에 한경면 판포리의 집 앞에서 경찰이 무장대로 오인해 발사한 총탄에 턱을 맞고 쓰러진 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 뒤 할머니는 무명천으로 턱을 가린 채, 말을 할 수도 없고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며 55년의 외롭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가 2004년 9월 8일 한 많은 세상을 등졌다.
현재 무명천 할머니의 생가는 '삶터보존위원회'에 의해 소박하게 단장돼 그녀의 비극적인 삶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자주 찾고 있다. 삶터보존위원회는 할머니의 삶터를 위해 돌담을 차곡차곡 쌓듯이 작은 정성들을 모았다. 진아영 할머니를 기억하는 사람들, 4·3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온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재주만큼 힘을 보탰다.
비가 새던 천장에 방수공사를 하고 도배도 새로 했다. 돌담도 정비했고, 마당에는 잔디를 깔고 화단도 꾸몄다. 방안 구석구석에 쌓여있던 먼지들도 햇볕에 말려냈다.
4·3으로 폐허가 된 동광리의 무등이왓과 삼밭구석. 마을을 포근히 감싸안은 거린오름과 원물오름, 그리고 멀리 도너리오름과 병오름 등으로 둘러싸인 동광리는 안덕면의 대표적인 중산간 마을이다. 4·3으로 인한 동광리의 인명피해는 엄청났으며, 마을의 구조와 위치까지 변화시켰다.
동광 마을에는 폐허의 마을 옛터와 시신이 없는 헛묘, 피신처였던 큰넓궤 등 4·3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어 고통의 세월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 동광리는 4·3당시 140여 가호에 살았던 주민 가운데 200여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1948년 11월 중순 이후 중산간 마을에 대한 토벌대의 초토화작전이 이뤄지면서 마을은 거의 전소됐고, 많은 주민들이 희생됐다. 4·3이후 동광리는 동광초등학교를 중심으로 한 간장리에 마을이 복구돼 지형이 '춤을 추는 어린이를 닮았다'는 데서 지명이 유래된 무등이왓과 삼밭구석, 조수궤 등의 마을은 영원히 사라졌다.
4·3당시 동광리주민들의 피신처인 큰넓게. 이곳에는 당시 피난민들이 화장실로 사용했던 흔적, 옹기조각과 동물의 뼈 등 당시 피난생활 유물들이 군데군데 남아있다. 이렇듯 4·3의 유적들은 진상규명과 더불어 당시 실상을 증빙하는 근거로, 4·3역사를 후손들에게 생생히 전달하는 사료로 도내 전역에 산재해 있다.
최근 일부 4·3유적지들이 비계획적이고 몰역사적인 개발로 인해 훼손되고 아예 없어지는 유적지들이 늘고 있어 안타깝다. 전문가들은 "4·3유적의 제도적 보호와 함께 평화 프로그램과 평화 투어리즘의 가능성을 준비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4·3 유적지는 바로 현장에 있는 생생한 박물관이다. 제주전역에 산재한 4·3유적지를 매개로 한 평화정책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참고자료=「4·3유적지 답사」(오승국 제주4·3평화재단 연구원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