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경자 제주도여성특위 여성사정립분과위원장

   
 
   
 
얼마 전 나는 여성의 직업의식에 관한 강의 제안을 받고 고민 아닌 고민을 했었다. 일찍이 사업을 시작한 남편 덕에 작지 않은 기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강의에 나설 정도로 전문적이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민단체의 실무진으로 일하고 있는 후배의 다급함에 생각지도 않은 정신적 압박을 자청하게 된 것이었다. 주어진 이틀의 시간을 부질없는 생각으로 허비하고, 나는 미련하게도 강의전날을 불면으로 새우고 말았다.

여성들이 일자리를 갖는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결혼한 여성들이 변변한 직장을 갖겠다는 것은 어쩌면 과한 욕심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강의해야할 대상이 바로 새로 일하려는 그런 여성들이었다. 나름의 학력과 능력을 가졌으나 한동안 집안일에 전념하느라 공백기를 가진 이들이었다.  

오래전 나 역시도 그들과 같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어렵사리 뚫은 취업의 관문을 결혼으로 인해 포기했었다. 그리곤 두 아이를 낳고 키우며 오로지 그 임무가 최선인양 온힘을 다했었다. 하지만 아이들을 학교에 입학시키고 다시 일을 해보려 했을 때 주위에 내 편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세상은 적잖은 내 나이가 불편했을 것이다. 무디어진 두뇌도 부담스러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이면엔 두 번의 산고로 성숙된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고통을 이기는 인고의 내성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두 아이를 키우며 얻은 행복감이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황홀했지만 나는 무의식 속에서 꿈틀거리는 일에 대한 열망으로 오랜 시간 몸살을 앓아야만 했다. 품어 왔던 이상과의 괴리감에 좌절하였으며 빈약하기만한 현실에 허망해했다. 때문에 모든 것을 이뤄주던 유년시절의 노부를 그리워하였고 꿈 많던 학창시절을 추억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냉정하게도 현실은 여전히 현실일 뿐이었고 세상을 향한 침묵적 항변만이 알량한 내 자존심을 지탱했었다. 그렇게 십년이란 세월을 보내면서 나는 내가 변하지 않는 한 세상은 변하지 않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학원에 진학을 하였고 그 때의 내 나이는 마흔이 넘어서였다.

나는 지금 일을 하고 있다. 대단치는 않더라도 내가 하고 싶었던 일들이다. 여자라서 할 수 없었고, 배움이 부족해 할 수 없다고 냉소했던 그 일들을 지금 하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세상이 변해서일까 아니면 내게 능력이 생겨서일까. 이런저런 생각에 밤을 새우고 나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강의장을 들어섰다. 밤바다의 별무리처럼 내게 일제히 쏟아지는 부담스러운 시선들. 그러나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긴 시간 가슴에 박혀있던 구절 하나를 끄집어냈다. '세상의 벽이 자꾸 높아진다고 말하지 마라/ 내가 작아지는 것이다/ 길이 점점 험해진다고 말하지 마라/ 내가 약해지는 것이다/ 세상이 변하는 것 같지만 결국 내가 변하는 것일 뿐/ 내가 커지면 세상은 다시 작아진다/ 벽은 낮아지고 길은 편해질 것이다/ 세상과 나는 반비례한다.   (여훈 '최고의 선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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