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혜영 소설가

분홍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뛰어 온다. 소녀의 작은 구두 뒤로 빗방울이 작은 종모양으로 튀어 오른다. 비에 흠뻑 젖은 초등학교 앞 우체통까지 뛰어간 소녀는 가방에서 고운 빛깔의 편지봉투를 꺼낸다. 소녀는 비에 젖을까 조심스레 우체통 안으로 편지봉투를 밀어 넣는다. 돌아서는 소녀의 환한 웃음이 쿰쿰한 잿빛 하늘과 대조를 이룬다.

초등학교 앞 빨간 우체통. 내가 소녀만 했을 때에도 그것은 그 자리에 있었다. 한때는 나도 소녀처럼 맨발로 달려 나와 누군가를 향해 밤새 적은 편지 봉투를 그 안에 넣었다. 어버이날 면전에서는 부끄러워 차마 건네지 못한 말들을 편지로 적어 부모님의 눈시을 적시기도 했고, 비밀스런 편지교환을 통해 은밀한 우정을 속삭였는가 하면, 이성을 향한 설레임과 가슴앓이를 부치지 못하는 편지로 대신하기도 했다. 소리 내면 퇴색해 버릴 것 같은 가슴 속 언어들을 고운 문장으로 만들어 날리기 위해 여러 날 밤을 하얗게 새웠다.

돌아보면, 그때는 '이 편지를 받은 후 48시간 이내에 44통의 답장을 보내지 않으면 불행해집니다.'로 압력을 주던 행운의 편지마저 받으면 설레고 웃음이 나오는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냈던 기억이 언제인지, 또 손으로 적어 내려간 편지를 받은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매일 우편함에는 새로운 고지서와 우편물이 쌓이고, 기십 통이 넘는 메일이 들어오지만 반가움보다는 귀찮은 마음이 더 크다. 가끔은 휴대폰에 들어오는 문자메시지마저 귀찮을 때가 있으니 아무래도 가슴으로 삭이지 않은 문장은 마음으로 전달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이 가을이 다 지나가기 전에 한번쯤은 그동안 옷장 구석에 처박아 놓은 편지상자를 꺼내야겠다. 단순한 생일 축하편지에서부터 열렬한 애정을 토로했던 연애편지에 이르기까지 내 젊음의 비망록을 담아 놓은 상자를 열고 잠시 그 시절의 마음으로 돌아가야겠다.

그리고, 오래 묵은 상자의 먼지를 말끔히 털어내고 난 뒤에는 많은 시간 동안 날 울고 웃게 했던 그리운 사람에게 짧게나마 편지를 한통 보내야겠다. 오랜만이란 말 따위는 생략하고 그저 잘 지내냐는 안부와 그립다는 말 한 마디 사이에 빛깔 고운 단풍잎 하나 접어 넣으면 가을을 보내는 내 마음을 그 사람도 알아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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