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를 지키는 사람들 20. 시조시인 고정국

"지역정신의 그릇인 제주어가 점점 사라지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제주어를 지켜야 정신이 지켜질 터인데 말이죠." 몇해전, 고정국 시조시인(62)은 제주사투리 시조 300수로 엮은 시집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이같이 밝혔다. 그는 작업과정에서 제주어가 지니는 음악성을 발견했고, 제주사투리 시조가 우리민족의 정형시인 3장 6구 12 음보에 짝짝 달라붙는다며 탄복했다. 어디 제주어 뿐이랴. 「서울은 가짜다」등 다수의 시집을 통해 시조가 지닌 담박미와 당대의 현실을 적확히 꿰뚫는 통찰미로 근대적 자아의 안팎 풍경을 밀도 있는 언어로 형상화하는데도 탁월하다. 창작 강좌를 잇달아 개설하고, 자신의 경험을 녹인 창작이론집의 출간을 앞두고 있는 그는 '시조의 신세대화'를 향해 다시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고향의 유년시절, 제주어로 풀어내다

   
 
  고정국 시조시인  
 

고정국 시인은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에서 태어났다.

4·3으로 엄혹한 시절을 견뎌야 했던 유년시절 고향은 또랑또랑 당차면서도 유려한 품성의 그에게 예술적 감수성을 불어넣어준 문학적 모태였다.

이는 시집「지만 울단 장쿨래기」(2004)을 내면서 "아무런 준비나 채록도 없이 타임머신을 타고 40여년전 고향으로 돌아갔고, 이르는 처소마다 그때의 사람들과 골목, 산천초목들이 만물을 열어 또박또박 건네는 말들을 '받아쓰기' 했다"는 그의 고백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그가「지만 울단 장쿨래기」 작업과정에서 제주어가 지니는 음악성에 놀라고, 제주사투리 시조가 우리민족의 정형시인 3장 6구 12음보에 짝짝 달라붙는 맛에 탐복했다는 사실은 '아픔에 따라 울음소리도 다르다'란 시집의 부제와 함께 그의 집요한 탐구심과 제주어에 대한 꼼꼼한 해설력을 가늠케 한다.

그가 시조시인의 계보에 든 것은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다. 그로부터 (사)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 지회장을 역임했으며, 시집으로 「진눈깨비」, 시조선집「개망초 마을의 풍경」, 제주어 시집「지만 울단 장쿨래기」「백록을 기다리며」, 산문집「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등을 펴냈다.

상복도 타고났다. 작품 '마라도 노을'로 중앙시조대상 신인상을 비롯해 「서울은 가짜다」가 2003년 문예진흥원 올해의 우수도서에 선정되기도 했다.「지만 울단 장쿨래기」로는 2004년 만해사상 실천 선양회 유심 작품상을 수상했다. 1995년에는 '남제주군 으뜸 군민상'을 받았고, 시조작가에게 최고의 명예라 불리는 '이호우 문학상'을 받았다.

#시조 미학의 지평을 열다
 
'시조'는 어딘가 고풍스럽고 현대적 실감과는 거리를 둔, 소멸된 역사적 장르로 오해되기 십상이다. 이런 때에 고정국 시인은 시조가 지닌 독특한 형식적 미학과 시조 본래의 시정신을 창발적으로 결합한 시들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시문학의 지평을 넓고 깊게 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집「서울은 가짜다」(2003)은 작금 풍경의 온갖 미혹 속에서 부화뇌동하지 않은 채 현실에 대한 응전력을 지닌 점, "가끔은 도시 전체를 싹 쓸어버리고 싶은/ 내가 하늘이어서도 그런 생각을 품었을 게야 저 거친 싸라비질만 봐도 세상 절반은 쓰레긴 게야//"('패러디인 서울·10-서울 소나기'전문)에서 보듯, 변방의 섬에서 서울로 표상되는 중심부를 향해 예각적인 문제의식을 드러낸다는 점이 높이 평가(문학평론가 고명철)됐다.

시집「서울은 가짜다」가 타락한 중심부에 대한 변방의 준엄한 비판이라면,「하늘가는 보리새우」(태학사 '우리시대 현대시조 100인선')는 상처입은 제주도민의 영혼을 향한 서정과 가난한 이땅의 민초들을 향한 온정, 민주를 위해 희생된 역사적 현실을 투시함과 동시에 인위적 삶의 터전에서 정복당하고 사라져간 자연 그 자체의 공간들에 띄운 애정어린 헌사(문학평론가 진순애)다.

그의 문제의식이 값진 것은 서울 중심으로 편재되었던 권력의 허상을 변방의 섬에서 준열히 비판하면서도 제주4·3 등 제주도민의 수난의 역사도 간과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쇄말적 감각으로 치닫고 있는 작금의 시문학 아쉬워"

한때 '곡괭이는 무른 땅을 찍지 않는다'는 글(「제주작가」제11호)에서 농촌문학의 쇠퇴에도 배부르고 따뜻한 부잣집 아랫목으로만 모여드는 작금의 문학과 문인들에게 쓰디쓴 일침을 가했던 그는 '돈'이라면 양잿물도 서슴없이 마시려드는 우리의 현실에 대해서도 일침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는 "경제문제를 푸는 정부의 태도는 마치 '당나귀와 당근' 같다"며 "비정규직과 청년 실업자들이 넘쳐나는데, 정부는 실질적인 해결책은 제시하지 않으면서 '당근'을 슬쩍 보일 뿐, 서민들에게 당나귀가 되라고 채찍질만 가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목적 없는 목표의 시대, '당근'만 쫒는 맹목(盲目)시대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한 날로 유약해지며 쇄말적 감각으로 치닫고 있는 시문학의 지평에도 일침을 놓았다. 그러면서 시조로써 시가 어떻게 갱신되어야 하는지, 또한 형상적 사유의 새로움은 무엇인지, 채 크고 작은 문제들에 어떻게 밀착해야 하는지를 실천하고 있다.

창작 강좌를 잇달아 여는 과정을 엮은 (가칭)「고정국의 창작 강좌-읽기 쓰기 사십 계단」이 출간을 앞두고 있다. 이는 특히 젊은이들에게 '시조는 고리타분한 옛 문학'이란 편견을 버리고, '시조는 민족정신의 그릇'이란 가치를 제대로 알리기 위함이다.

내년부터 후배 작가 양성과 전국 학생 시조 백일장 등을 통해 '시조의 신세대화'에도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제주시조의 미래를 향해 뚜벅 뚜벅 걸어가는 시인의 뒷모습이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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