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혜영(소설가)

그 곳엔 의자가 있었다. 한파가 빗겨간 주말 오후, 방문한 낙천리의 의자공원엔 빈 의자들이 둔덕을 이루고 있었다. 꽃무늬가 그려진 둥근 의자, 하늘에 닿을 듯 촘촘히 올라간 의자탑, 넉넉하게 펼쳐진 나뭇잎 모양의 벤치가 서 있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겨울이 머물고 있는 탓일까? 공원 둘레를 에워싼 감귤이 정겹게 반겨주었지만, 비어 있는 의자에선 진한 외로움의 냄새가 풍겼다. 커피 한잔을 들고 1000여 개의 의자 사이를 지나 작은 의자에 앉았다. 그동안 나를 스쳐간 의자들이 생각났다.

나의 첫 의자는 아버지가 손수 만들어 준 나무의자였다. 아버지는 토끼장을 만들고 남은 동강이를 덧대어 밀고 깎아 작은 의자 하나를 만들었다. 목수일이 서툴어 다리길이가 좀 어긋났는지 엉덩이를 붙이면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어 마분지 조각으로 바닥을 괴어 놓은 의자에서 나는 유년기를 지냈다. 이후로 등받이가 높고 길었던 의자, 깔개 부분이 둥그렇게 퍼져 편하게 기댈 수 있었던 의자, 꽃무늬 패브릭으로 덮은 화장대 스툴 등 각기 다른 모양의 의자가 나와 함께 했다.

겨울 어느 날엔가, 약속한 누군가가 오지 않는 바람에 칠 벗겨진 나무 벤치에서 세 시간 이상을 기다렸던 적이 있었다. 휴대폰은 물론, 삐삐도 없던 시대에 앉을 의자가 없었다면 차마 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그 탓인가 나는 아직도 '빈 의자'를 보면 누군가를 기다려야만 할 것 같다.

특히 오늘같이 볕좋은 오후면 나는 연락도 없이 무턱대고 찾아간 낯익은 장소에서 옛 친구와의 조우를 꿈꾼다. 시계와 휴대폰은 잠시 풀어둔 채 두꺼운 책 한 권 펼치고 앉아 있다 인연을 만나는 일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

설사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도 아무도 만나지 못한다 해도 좋을 것이다. 봄에는 따스한 햇살이, 여름에는 그늘이, 가을엔 낙엽이, 겨울엔 새하얀 눈꽃이 의자 위에서 벗을 대신해 줄 것이기에….

사람을 기다린다는 건, 시간이 고이는 '빈 의자'에 앉아 있는 일인 것 같다. 누군가 잠시 옆에 머물렀다 떠남을, 세상의 바람과 비와 눈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 그것은 비어 있어야 또한 채울 수 있음을 깨닫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완전히 채워 버리면 더 이상 담을 수 없음을 느린 겨울 오후, 빈 의자에 앉아 생각해본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