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홍·언론인

   
 
   
 
'비판기능'을 강화해야 합니다. '참다운 언론'이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래야만 합니다. '비판'은 신문의 생명입니다. '비판기능'을 상실한 신문은 이미 언론이 아닙니다. 본란은 올해도 어김없이 '비판'과 함께 출발합니다.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 '비판'을 가로막는 장애요소가 도처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저해선 안 됩니다. 그건 지혜롭게 극복할 대상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반성해야 합니다. '자신의 무능이나 나태함을 변명하는 구실'로 그것을 이용하고 있지 않은지를….

'비판'은 그 자체 '언론의 목적'입니다. 그건 틀리지 않습니다. 그것을 언론의 한 기능으로 의미를 축소하는 건 잘못입니다. 그것은 아무 목적에나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단순한 수단' 같은 게 아닙니다. '비판'은 분명 신문의 한 기능이지만, 목적에 따라 다르게 결정되지 않습니다.

'비판'은 언론의 목적이지만, 비판 그 자체는 목적을 같지 않습니다. 오해는 금물입니다. 수단에 이미 목적이 들어 있다는 것은 이 경우 도저히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칫 '불순한 의도'일 수 있습니다.

그건 용납되지 않습니다. '불순한 의도'는 '언론의 목적'을 악용한 사이비입니다. '비판'은 그 어떤 경우에도 정직해야 합니다. 비판의 참다운 의미는 자신에 대한 엄격함이나 순수함에서 비롯됩니다. 그만큼 진솔해야 합니다.

'부정적 강성단어'를 동원했다고 하여 비판이 되는 건 아닙니다. 그 소재가 지역적 시대적 상황에 적합해야 합니다. '아님'의 논리가 분명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지역적 시대적 문제의식에 따라 그 소재가 어떤 것이냐고 물으면, 그 답은 그 물음에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의미를 부여하여 이야기 한다면, 그건 '현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안'입니다.

비판의 논리는 논리적 타당성과 실제적 적합성의 연관 속에서 등장합니다. 특정 사안이 실천되고 있는 현장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자기 자신의 현장'에다가 그것을 억지로 맞추어 넣으려는 것은 한마디로 '기자의 편견'입니다. 시각을 어떤 구조의 단편에만 고정시키는 것 역시 그 자체가 허위입니다. 개념을 잘못 사용할 때 생기는 '분석적 오류'는 차마 여기서 이야기 하지 못합니다.

'비판 즉 대안'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비판하는 것 자체가 대안성을 높이는 이성적 작업입니다. 언론은 문제제기로서 충분합니다. '어떤 문제가 왜 문제일 수밖에 없는가'를 깨닫는 것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결정적 진보이기 때문입니다.

특정 기사를 들어 설명하는 것은 번거롭습니다. 그건 차후의 일입니다. 그러나 제민일보를 지면따라 읽다가 보면, '비판기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은 표피에 머물 뿐이고, 어떤 것은 조금 더 깊이 접근했을 뿐, 아쉽게도 그 핵심을 관통하는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언론현장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의 경험이 저의 이해를 정당화하는 근거로는 사용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차피 본란도 관심있는 여러분들의 비판적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강정홍·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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