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에서 뛰쳐나온 나르시시즘은 자만과 파괴를 상징한다. 현대 정신분석학자들에 의해 나르시시즘으로 부활한 나르시스는 신들의 저주를 받아 물에 비친 자기만 쳐다보다 결국 물에 빠져 죽은 비극의 주인공이다. 나르시스란 말은 그리스어의 나르코시스(Narcosis), 다시 말해 마비(麻痺)에서 출발한다. 자신을 가지고 싶어하는 애통함으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중독성, 남이 인정해주지 않는 '내가 최고'를 스스로 보호하려는 집착이 나르시시즘의 뼈대다.

6·2지방선거 열기가 뜨겁다. 그들이 험하디 험한 선거판에 뛰어든 가장 큰 이유는 '인정 욕구'때문이다. '인정 욕구'는 돈이나 권력에 대한 탐욕보다 더욱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돈이나 권력은 잘살기 위한 수단일 수 있지만 '인정 욕구'는 그 자체로서 삶의 목적이 되기 때문이다. 정치 개혁을 해보겠다는 좋은 뜻을 갖고 있을수록 '인정 욕구'는 강해진다. 하지만 대신 민주주의 교과서에서 말하는 선거는 사라지고 삶의 의미를 위한 전쟁만이 남게 된다. 정치 개혁은 그 투쟁의 와중에서 시나브로 자취를 감추게 된다. 재미있고도 놀라운 것은 많은 정치행위자들이 이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건 우국충정(憂國衷情)과 이타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른바 정치 나르시시즘이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다보니 우리 역시 거기에 익숙해지고 있는 느낌이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서 찾은 다른 각도의 나르시시즘이다. 책 속에서 숲의 요정들은 나르키소스의 죽음 이후 쓰디쓴 눈물을 흘리는 호수와 만난다. 나르키소스를 애도한다던 호수 역시 그의 눈에 비친 자신을 볼 수 없음을 한탄한다. 나르키소스만이 아니라 그를 비추던 호수 역시 '자기애(自己愛)'에 빠졌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이번 역시 정책선거를 부르짖었지만 현실은 많이 다르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데 제대로 된 공약을 비교할 기회는 점점 줄어드는 대신 여기 저기 귀에 불편한 소리가 들린다. 누구를 탓할 수도, 모른 척 외면하기도 힘든 상황에 될 대로 되라 식으로 아무나 찍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유권자 주권을 포기한다면 스스로 나르시시즘에 빠졌음을 인정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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