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또 다른 기억 유배문화, 그것의 산업적 가치 13)유배인의 제주여인과의 사랑

   
 
  ▲ 한라산은 제주도를 대표하는 대표 브랜드다.유배인들은 망망대해에서 한라산을 바라보며 제주에서의 기한이 정해지지 않은 유배생활을 예감했다. 한라산 관음사 코스 해발 1200m에서 1300m 사이에 자생하는 소나무 군락이 한라산의 위엄을 전하고 있다.  
 
   
 
  ▲ 한라산은 제주도 중앙에 우뚝 선 산이다. 한라산 관음사 코스 등산로에 위치한 왕관릉에서 본 백록담.  
 
   
 
  ▲ 한라산 백록담 동쪽 바위에 새겨진 조관빈과 조영순의 마애명. 조관빈은 조정철의 작은 할아버지, 조영순은 조정철의 아버지로 이들은 3대에 걸쳐 제주에 유배와 그들의 처절한 심정을 담아 이름을 백록담 바위에 새겼다. 같은 글씨체인 것으로 봐 조정철 목사에 의해 새겨진 것으로 추정하고 잇다.  
 
   
 
  ▲ 제주에 유배인에서 목민관으로 제주와 인연을 맺었던 조정철과 슬픈 사랑의 여정을 밟았던 제주 여인 홍윤애의 묘비명.  
 
   
 
  ▲ 제주에 유배인에서 목민관으로 제주와 인연을 맺었던 조정철과 슬픈 사랑의 여정을 밟았던 제주 여인 홍윤애의 묘. 제주시 전농로에서 있던 묘가 애월읍 유수암리로 이장됐다. 사진 왼쪽이 홍윤애의 묘다. 사진 오른쪽은 외손자 박규팔의 묘로 알려져 있다.  
 
   
 
  ▲ 유배인 조정철과 애틋한 사랑을 나눴던 제주 여인 홍윤애의 묘가 있던 터. 제주시 전농로에 옛 터에는 표지석만 남아 있다.  
 
한라산은 제주도의 중앙에 솟아 있는 산이다. 제주 섬 어디에서나 한라산을 볼 수 있다. 제주의 동서남북, 보는 위치에 따라 한라산은 비슷하게 또는 달리 보인다. 한라산(漢拏山)은 은하수를 끌어당길 수 있는 높은 산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해발 1950m 정상에는 백록담이 있다. 조선시대 제주에 유배 왔던 유배인들은 망망대해에서 한라산을 보며 제주를 찾았다. 유배인들은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은 유배형을 살아야만 했다. 3대에 걸쳐 제주에 유배 왔던 조관빈, 조영순, 조정철은 한라산 정상에 올라 유배 왔던 기록을 바위에 새겼다.

#조정철 집안의 3대에 걸친 제주유배

조정철은 정조 1년(1777년) 제주를 찾았던 유배인이자 순조 11년(1811년) 제주목사로 다시 제주를 찾았던 목민관이다.

조정철의 증조부는 경종 때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과 함께 노론 4대신으로 일컫는 조태채다.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경종이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경종이 병약하고 후사가 없자 노론 대신은 연잉군(영조)을 왕세제에 책봉하자고 주장한다.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을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싸움으로 조태채는 진도로 유배된다. 이를 신임옥사(신축옥사, 임인옥사)라 하는 데 이와 연좌돼 1723년 조태채의 장남 조정빈이 제주 정의현에 유배되며 차남 조관빈은 흥양현(고흥),  3남 조겸빈(조정철의 할아버지)이 거제도에 유배됐다가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유배가 풀린다.

조정철의 종조부인 조관빈은 영조 7년(1731년) 영조의 탕평책에 대해 '음도 아니고 양도 아니'라고 상소했다가 제주 대정현에 유배된다. 조관빈은 이해 12월 제주에 와서 대정성 북문 김호의 집에 6개월간 머물다 유배가 풀린다(해배된다). 1732년 한라산에 올라 '유한라산기'를 남겼다. 제주에서 쓴 시문을 담은 「회헌집」을 남기고 있다. 조관빈의  '탐라잡영'을 보면 '두 아내가 한 집에 있으니 생활이 곤란한데'라며 제주의 처와 첩의 한 집안 살이 풍경을 기록하고 있어 이채롭다.

조정철의 아버지 조영순은 영조 30년(1754년) 영의정 이천보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 대정현에 유배된 바 있다.

조관빈과 조영순은 제주에 유배된 사연과 한라산 정상을 밟은 연월을 기록한 마애명을 백록담 동쪽 바위에 남겨 설움의 유배생활을 전하고 있다.

「제주도 마애명」을 보면 1732년 3월에 조관빈은 대사헌으로 간언을 올린 일 때문에 귀양 오게 돼 이 산의 절정에 올랐다. 조영순은 부수찬으로 간언에 관한 일 때문에 이곳 제주에 유배 오게 되었으며 이 산의 정상에 올랐다. 1755년 3월이다. 이 같은 내용은 백록담 바위에 나란히 기록돼 옛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조정철의 마애명은 한라산 동쪽 바위에 있다가 낙반으로 백록담 물가로 옮겨져 파란만장한 조정철의 삶을 전하고 있다.  '조정철은 정유년(정조 1년, 1777년) 이곳으로 귀양 와서 경술년(정조 14년, 1790년)에 풀렸다. 조정철은 신미년(순조 11년, 1811년)에 방어사로 와서 이곳 절정에 이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애명은 낙반되면서 아랫부분이 파손돼 있다.

#조정철과 홍윤애의 사랑

조선조 제22대 임금 정조는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시해 사건에 연루, 조정철은 정조 1년(1777년) 제주목에 유배된다.

조정철의 장인은 홍지해다. 홍상범, 강용휘 등이 정조의 이복동생 이찬을 내세워 반역을 꾀하다 실패한다. 죄인을 신문하는 과정에서 홍상범의 여종인 감정이 조정철의 집에 드나들었다는 진술이 나온다. 조정철은 참형의 위기를 맞지만 영조의 왕세제 책봉에 공헌한 증조부 조태채의 공적을 감안해 사형보다 한 단계 낮은 유배형을 받는다.

조정철이 1777년 9월 제주로 유배되자 여종 감정과 접촉했던 아내 홍씨는 시댁에 대한 죄의식으로 자결한다.

조정철의 배소는 제주성 신호(보수주인)의 집으로 정해진다. 조정철은 시문집 「정헌영해처감록」을 남겼다.

「정헌영해처감록」에는 유배인 조정철과 제주 여인 홍윤애와의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담겨있다. 조정철은 제주에 유배되자 아내 홍씨의 죽음을 접한다. 그의 나이 27세 때였다. 젊은 유배인의 처소에 스무살 남짓한 젊은 제주 여인이 때때로 드나들며 인연을 맺는다. 제주 여인은 향리 홍처훈의 딸 홍윤애다. 홍윤애는 어린 기녀로 면천돼 집에 있다가 때때로 조정철의 처소에 출입했다. 조정철과 홍윤애는 사랑을 키우게 되고 사랑의 결실로 사랑스런 딸을 얻는다.

하지만 조정철 가문과 원한을 갖고 있던 김시구가 제주목사로 오면서 젊은 남녀의 사랑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홍윤애가 조정철의 유배지에 출입하는 것을 안 김시구는 조정철을 '고을의 여자 하인(읍비)과 간음했다'는 죄목으로 옭아매려한다. 김시구는 이에 대한 자백을 이끌어 내기 위해 홍윤애를 서까래와 같은 매로 70대를 때린다. 홍윤애는 행여 조정철이 해를 입을까봐 이에 불복한다. 끝내 목을 매 자살하기에 이른다. 정조 5년(1781년) 윤 5월15일의 일이다.

양주조씨 사료선집을 보면 홍윤애는 관아로 잡혀 가기 전 딸을 한라산으로 피신시킨다. 출산한지 3개월여로 유방이 불어 있던 홍윤애는 고문 때 처녀의 몸으로 왜 유두와 유방이 부풀었는지를 가혹하게 고문하자 태어난 원래 체질이 그렇다고 완강하게 불복해 입을 열지 않고 끝내 죽음의 길을 택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홍윤애의 죽음으로 김시구는 파직 당하고 안핵어사 박천형이 제주에 온다. 조사를 끝낸 조정철은 100여일 동안 갇혔던 옥에서 풀려난다. 관아로부터 배소를 옮기라는 명령을 받는다. 보수주인 김윤재의 집으로 옮긴다.

이후 1782년 제주 정의현(성읍) 김응귀의 집으로 유배지를 옮긴다. 보수주인 김응귀가 자신이 쓴 편지 때문에 체포됐다가 다행히 풀려난다. 이후 조정철을 더 이상 시를 짓지 않겠다고 선언한 후 절필한다.

조정철은 1790년 9월 추자도로 이배되며 1803년 전라도 광양을 비롯해 이곳저곳 옮겨 다니다 1805년 7월 석방된다. 제주에서만 27년의 유배생활을 한 셈이다.

조정철은 순조 11년(1811년) 61세의 나이에 제주목사로 부임해 1년여간 머물다 떠난다. 그 기간 자신을 위해 희생의 길을 택한 홍윤애의 묘를 찾아 묘비명을 쓴다. "홍의녀는 '공이 살게 되는 것은 내가 죽는 것에 달려있다'라며 간사한 사람의 계략에 불복했다"라는 애달픈 비문을 남긴다.

홍윤애의 묘는 제주시 전농로에 위치해 있다가 제주공립농업학교가 전농로에 들어서자 평화로 인근 애월읍 유수암리로 이장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정철과 홍윤애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는 제주 창작 오페라 '백록담'으로 스토리텔링 작업을 거쳐 문길상과 구슬이로써 무대에 오른 바 있다.

조정철의 시문집 「정헌영해처감록」에는 신분을 뛰어넘은 유배인과 현지 여인과의 애틋한 사랑, 목사나 현감의 유배인에 대한 굴욕적인 점호(유배인의 생활상), 절해고도에서의 유배인의 처절한 삶(유배인의 실제 삶)이 생생히 담겨 있다.

특히 '탐라잡영', '귤유품제'를 비롯해 제주에서 쓴 시는 유배인이 본 18세기 제주민들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글·사진=장공남 기자 gongnam@je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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