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또 다른 기억 유배문화, 그것의 산업적 가치 15)다른지역 유배인:사촌서당과 다산초당

 

   
 
  ▲ 사리마을 앞바다에 출항을 앞둔 배들이 정박해 있다. 정약전은 사리마을에서 어류 백과사전인 자산어보를 저술했다.  
 

   
 
  ▲ 신유박해(1801년)로 신지도에 유배됐던 손암 정약전은 황사영백서사건이 발생하자 한양으로 끌려와 국문 끝에 절해고도의 섬 흑산도에 유배된다. 흑산도 사리마을에 머물며 제자들을 길어냈던 사촌서당이 복원돼 있다. 흑산도 유배문화체험공원으로 조성되고 있는 사리마을 전경.  
 

   
 
  ▲ 신유박해(1801년)로 신지도에 유배됐던 손암 정약전은 황사영백서사건이 발생하자 한양으로 끌려와 국문 끝에 절해고도의 섬 흑산도에 유배된다. 흑산도 사리마을에 머물며 제자들을 길어냈던 사촌서당이 복원돼 있다.  
 

   
 
  ▲ 흑산도 상라산 정상에서 본 흑산도 예리항 인근 풍경.  
 

   
 
  ▲ 흑산도 상라산 전망대에서 본 홍도.  
 

   
 
  ▲ 나이 어린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한 정순왕후는 천주교를 빌미로 남인 시파를 숙청한다. 황사영백서사건에 연루, 다산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에 유배돼 다산초당 등에 머물며 학문에 몰두한다.  
 

   
 
  ▲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해 구성한 다산초당 현판.  
 

   
 
  ▲ 다산 정약용이 다산초당 인근 석벽에 정석(丁石)이라 글씨가 남아 정약용이 머물렀다는 것을 전한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는 영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과 깊게 연관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순왕후는 1800년 정조가 죽자 어린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한다. 정순왕후는 노론 벽파를 등용하는 반면 천주교를 구실로 남인 시파를 정계에서 몰아낸다. 순조 1년(1801년) 일어난 신유박해다. 천주교도인 황사영은 신유박해의 실상을 베이징의 주교에게 알리려 하지만 발각된다. 이 때문에 황사영의 아내 정난주(또는 정명련)가 제주 대정으로 유배된다. 황사영을 조카사위로 두고 있던 정약전(1758~1816)과 정약용(1762~1836)은 이 사건으로 각각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된다. 유배를 관광 상품으로 이끌어 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흑산도와 강진이다.

#흑산도에서 조선시대 어류백과사전을 쓴 손암 정약전

정약전과 정약용은 형제다. 정난주는 이들의 큰 형 정약현의 딸이다. 손암 정약전은 매형이면서 조선 천주교 사상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세례명 베드로) 등과 어울리며 천주교 신자가 된다.

정약전은 신유박해로 신지도에 유배됐다가 황사영백서사건으로 한양으로 압송돼 국문 후 흑산도로 유배된다. 동생 정약용과 함께 한양을 출발해 나주목 율정주점(현 나주시 대호동)까지 같이 간 후 각자의 유배지로 향한다.

정약전은 44세 때인 1801년부터 1807년 봄까지 6년 동안 우이도에 머문다. 당시 우이도는 소흑산도로 불렸다. 이후 흑산도 사리마을로 옮겨 사촌서당(복성재)에서 섬 아이들 5~6명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특히 조선시대 어류백과사전인 「자산어보」를 남겼다. 또 우이도 사람으로 홍어를 팔던 문순득이 오키나와, 필리핀, 일본 등을 표류했다는 경험담을 듣고 이를 토대로  「표해록」을 대필한다.

정약전이 동네 아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던 터는 서당터로 남아 있다가 사촌서당으로 복원됐으며 최근 신안군은 이 일대를 흑산도 유배문화공원을 조성하고 있다.

조선시대 서남쪽 최남단에 위치한 흑산도는 유배지였다. 하지만 1960년대에는 어업의 전진기지로 풍어를 바라는 배들의 정박지였다. 당시를 말해주는 노래가 '흑산도 아가씨'다. 정약전은 흑산도 유배기간 현지 여인과 인연을 맺어 아들 2명을 얻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자산어보」에는 현지 주민 장덕순(창대)과 함께 흑산도 주변의 어류, 해조류 등 227종의 수산자원을 연구, 설명을 담았다. 흑산도 여객선터미널 인근에 자산문화관에는 자산어보에 소개된 흑산도 수산물이 전시돼 있다.

정약전은 독(항아리)술을 마실 정도로 술을 좋아했다. 이 때문에 어민들과 쉽게 친해져 어류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얻은 것으로 보인다.

흑산도 특산물 홍어에 대한 정약전의 설명이 이채롭다. 홍어 암컷이 낚싯바늘을 물고 발버둥칠 때 수컷이 암컷에 붙어 교미하면 암수 다 같이 낚싯줄에 끌려 올라오는 예가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암컷은 낚시에 걸려 죽고 수컷은 간음 때문에 죽는 데 이는 음란한 것을 탐내는 자의 본보기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약전은 동생 정약용이 유배가 풀린다는 소문을 듣고 우이도로 옮기지만 유배 15년만인 1816년 한 많은 생을 마감한다.

#강진에서 「목민심서」를 쓴 다산 정약용

다산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년)경기도 마현(현재의 남양주시 능내리)에서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과 해남윤씨 사이에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정약용은 정조의 총애를 받던 남인 실학자였다. 수원 화성 축조 때 거중기를 고안해 공사 기간을 단축시켰다.

정권이 바뀌자 기나긴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1801년 장기현(현 포항시 장기면)에 유배된다.  장기 유배기간 시 '아가사'를 남겼다. '박 하나 두둥실 수면 위로 떴더니만/홀연히 물쥐같이 머리통을 내밀고서/ 휘파람 한 번 부니 몸이 따라 솟구치네'
마치 잠녀의 작업을 시를 읊은 듯하다. 제주의 전유물로만 알던 잠녀가 다른 지역에도 있었던 것인지 연구가 필요한 시다.

조카사위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정약용은 1801년 전라도 강진에 유배된다. 불혹의 나이인 40세에 중앙 정치와 단절된 유배형에 처해진 정약용은 학문에 몰두한다.
주막에 유배지를 정하고 '사의재'라 이름 지어 4년간 생활한다.  이어 고성사 보은산방으로 옮겼다가 다산에 자리 잡은 다산초당에 정착한다.

1808년부터 1819년까지 10여년동안 다산초당에 머물며 제자를 기르고 저술활동에 전념해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의 역작을 내놓는다.

자식 교육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편지로써 교육했다.

정약용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 중 술 교육에 대한 편지를 보면 술맛은 입술을 적시는 데 있다면서 술을 마시는 정취는 살짝 취하는 데 있지 얼굴이 붉을 정도로 마셔 토악질을 하는데 있지 않다고 충고하고 있다.  세월이 흐른 현대까지 유효한 충고다.

정약용은 의학, 법률, 행정 등과 관련된 600여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기고 있다. 또 다산초당 인근 석벽에 새긴 정석(丁石)이란 글씨는 강진 유배의 흔적을 전한다.
다산초당을 경유하는  '정약용의 남도 유배길'이 2010년 3월 선보이며 문화와 생태관광의 결합을 시도하고 있다. 글·사진=장공남 기자 gongnam@jemin.com

유배 인터뷰=이영일 윤영선

"「자산어보」는 해양 백과사전"
이영일 흑산도 문화관광해설가

   
 
  ▲ 이영일 문화해설가(신안군 흑산도)  
 
"어류와 해조류 등 227종이 수록된 자산어보는 해양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전라도 흑산도 토박이인 이영일 전라남도문화관광해설가(신안군)는 손암 정약전이 흑산도 유배 때 쓴 「자산어보」를 이같이 설명했다.

이영일 문화해설가는 "흑산도는 고려말 삼별초의 난 이후로 섬 주민을 나주 영산현으로 이주시켜 조선전기에는 공식적으로는 섬이 비어 있었다"며 "임진왜란 전후로 흑산도에 입도하게 된다"고 말했다.

정약전이 동네 아이들을 교육했던 사리마을 사촌서당 일대는 유배체험장, 야생화 쉼터, 숙박시설 등이 들어서는 흑산도 유배문화체험공원으로 조성된다.

이영일씨는 "유배문화공원이 생기면 마을을 스쳐 지나던 관광객들이 마을에 머물 것으로 주민들은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영일씨는  "자선어보에는 물고기 뿐만 아니라 해조류, 조개류가 소개됐다"며 "지난 2002년부터 3년 동안 흑산도의 물고기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는데 당시 내용을 보충해 주민이 쓴 자선어보를 내고 싶다"고 덧붙였다.


"문화와 생태가 어우러진 길"
윤영선 강진군다산수련원 전문위원

   
 
  ▲ 윤영선 강진군다산수련원 전문위원  
 
"정약용의 남도 유배길은 문화와 생태를 코드로 코스를 잡아 유배에만 한정짓지는 않았다"

다산 정약용의 강진 유배를 콘텐츠로 지난 3월 모습을 드러낸 산남대로를 따라가는 정약용의 남도 유배길 조성을 주도한 윤영선 강진군다산수련원 전문위원은 이같이 밝혔다.

윤영선 전문위원은 "과거의 문화를 통해, 젊은 사람들이 걸을 때는 꿈을 꾸게 해주고 중년들이 걸었을 때는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도록 길을 조성했다"며 "생각하며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윤 전문위원은 "사람은 길을 만들고 길은 사람을 만든다"며 "정약용이 말하는 사람은 요즘 말로 하면 나누고, 어려운 사람들 보살피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또 윤 전문위원은 "시장길, 골목길, 농사길 등을  연결했다"며 "행정, 법률, 의학, 농사 등에 능해 화가이자 과학자, 발명가인 동양 최고의 팔방미인 정약용이 꿈꾸던 세상이나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같다. 생태이기도 하고 평화이기도 하고, 공동체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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