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의 육필기록] <1>4·3취재반 출범①

   
 
  1987년 6월항쟁 당시 제주시 남문로터리에서의 시위모습  
 
민주화 열기와 4·3 40주년 진상규명 요구
'외부압력 대응 방벽' 16명의 취재반 구성

4·3취재반 출범①      
  

   
 
  1988년 출범한 4·3특별취재반의 구성원들  
 
1988년 3월 5일 제주신문 4·3취재반이 결성됐다. 취재반장은 사회부장인 내가 맡게 됐다. 마음에 준비도 없이 덜컥 그런 중책을 맡게 됐지만, 피할 도리가 없었다. 그해 8월 정경부장으로 옮겼으나 취재반장직은 계속됐다.

당시 불어온 민주화 바람은 매우 거셌다. 엄청난 격변의 시기였다. 30년 군사정권이 세운 허상들이 하나씩 무너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4·3 금기의 벽이었다.

철옹성처럼 단단하게 보이던 군사정권은 1987년 1월 14일 일어난 서울대 학생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때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호헌 철폐'와 '독재 타도'의 물결은 6월항쟁으로 이어지면서 전국이 뜨거웠다. 노태우의 개헌선언이 있었지만, 그 절정은 그해 7월 100만 인파가 서울시청 앞 광장 일대를 온통 뒤덮은 연세대 학생 이한열 장례행렬이었다.

이런 전국적 열기가 제주까지 이어졌다. 그해 6월 제주거리에도 최루가스가 쏟아졌고, 민주화를 열망하는 시위는 점점 수위가 높아갔다. 이 시위는 제주대 학생 등 대학생들이 주도했다. 시민들도 가세했다. 제주시내 남문로터리, 중앙로터리에서 연일 시위가 벌어졌다. 대학생들이 똘똘 뭉쳐 시위를 벌이는 이면에는 4·3이 한몫했다.

그해 4월 3일 제주대 구내에  4·3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대자보가 나붙었다. 그런데 경찰이 이를 문제 삼아 4월 15일 대학생 2명을 연행했다. 그 일이 변곡점이 될 줄은 경찰도 예상치 못했다. 대학 사회가 분노했다. 그동안 학내 집회는 이른바 운동권 학생들이 주로 참석하는 수준이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일반 학생들의 참여가 크게 늘었다.

학생들은 중간시험을 거부하며 연행 학생을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연행 학생은 사흘 만에 석방됐다. 그 다음날인 4월 18일 비상학생총회가 열렸다. 경찰에서 풀려나온 여학생회 회장 송영란은 4·3 대자보를 붙였던 이유를 설명한 뒤, 눈물을 흘리며 '타는 목마름으로'를 불렀다. 그 자리에 함께 했던 3000명의 학생들이 그 노래를 따라 불렀다. 4·3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제주신문은 당시 제주도내의 유일한 일간지였다. 5공정권이 만들어낸 '1도 1사' 언론 정책의 결과였다. 그런데 그 신문사 편집국에서 1988년 벽두부터 4·3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젊은 기자들을 중심으로 4·3사건 40주년을 맞는 기획 특집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개진됐다. 신문이 4·3문제를 다루기에는 시기상조라는 우려도 있었지만 우려의 목소리는 작았다.

어느 사이엔가 "단발성 기획물로 할 것이 아니다. 특별취재반을 구성해서 본격적인 진상규명에 나서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민주화 열기와 4·3 발발 40주년이란 시기적 의미가 겹치면서 상승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된 뒤 며칠 지나지 않아 4·3취재반이 '전격적으로' 결성됐다. 엉겁결에 취재반장을 맡은 내가 처음 한 일은 취재반 구성이다. 4·3취재반은 16명의 기자들로 구성됐다. 외근 기자 20여명 중 경제계나 문화계 등 일부 출입처의 기자를 제외하곤 대부분 포함시켰다. 백지 상태에서 4·3의 진실을 규명하자니 많은 인력도 필요했지만, 외부의 압력에 대응할 수 있도록 방벽을 쌓자는 의도도 있었다. 그만큼 겁이 났다.

4·3취재반은 한국 언론사에 몇 가지 진기록을 남겼다. 특별취재반의 16명이란 숫자도 전무후무할 것이다. 나는 취재반 기자들에게 4·3과 관련 있는 자료들을 닥치는대로 모을 것을 주문했다. 그날부터 4·3자료와 씨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악몽에 시달려야만 했다.

"금기의 역사 깨고 평화·인권 상징으로
4·3 진상규명 발자취 도민들과 공유"

진실찾기 과정서 대통령 직접 사과 때는 눈물
진상보고서 확정 후 '미완' 평가에 충격받기도

●인터뷰/양조훈 전 제주도환경부지사

지금은 누구나 제주4·3의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20여년전 군사정권시절에는 입에 담는 것 조차도 금지됐다. 제주4·3이 '금기'(禁忌)의 역사를 극복하고 오늘날 평화·통일·인권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에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도 가득하다. 1988년 4·3 취재반장을 맡은 이래 특별법 제정, 대통령 사과 등 4·3 진실찾기 현장에서 몸으로 부닥친 양조훈 전 환경부지사의 생생한 육필기록을 매주 2회(화, 금) 연재, 4·3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색한다.

   
   양조훈 전 제주도환경부지사 /사진=김대생 기자

■양조훈은…
<약력>

- 제주신문 및 제민일보 4·3취재반장
- 제민일보 편집국장
- 4·3특별법 쟁취 연대회의 상임공동대표
- 국무총리 소속 4·3위원회 수석전문위원
- 국무총리 소속 민주화위원회 기념분과 위원
- 4·3평화재단 상임이사
-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 역임

<수상>
- 송하언론상
- 한국기자상
- 제주문화상(언론출판부문) 

 

 
△4·3 진실찾기 운동의 한복판에 서서 일해 온 것은 널리 알려졌습니다만, 회고록을 집필하게 된 계기는.
-오래전부터 주변에서 한번 정리해보라는 주문이 있었습니다. 박원순 변호사, 서중석 교수,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같은 분의 권유도 있었고요. 20여 년간의 4·3규명작업이 겉으로는 일사천리로 이뤄진 것 같지만, 이면에는 알려지지 않은 얘기가 많고, 누군가는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고 여겨 작업에 나서게 된 겁니다.

△어떤 이야기들이 연재되나요.
-12년 동안의 4·3취재반장 및 특별법 제정운동, 8년 동안의 4·3위원회 활동, 그리고 귀향해서 4·3평화재단에 관여했던 이야기들을 정리해 볼까 합니다. 저의 체험을 중심으로 엮지만, 그 시대의 진실찾기 운동사도 함께 살펴볼 계획입니다.

△많은 비하인드 스토리가 소개된다는데.
-4·3 진실찾기 발자취를 다시 걸어보는 의미도 있지만,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뒷 얘기도 가능한 범위까지 다뤄볼까 합니다.

△사전에 몇가지 일화를 소개해주시죠.
-하마터면 4·3진상조사보고서를 발간하지 못할 위기도 있었고요, 대통령 사과가 있기까지 참 아슬아슬했습니다. 막판까지도 대통령이 사과하면 '대한민국 정통성이 무너진다'는 보수단체의 저지가 치열했습니다. 다른 과거사 지원단장이 4·3평화공원 위패봉안소를 둘러보다가 원혼에 씌웠는지 한동안 고생한 일도 있는데, 저가 이를 풀기 위해서 위령행사를 주선한 일도 있습니다. 

△많은 일을 하면서 기뻤던 일도 있었을 텐데요, 한가지를 소개한다면.
-역시 대통령이 직접 사과할 때입니다. 눈물이 나오더군요. 제가 일본에 가서 강연을 할 때 이 이야기를 언급하자 이미 알려진 사실인데도 재일동포들이 눈물을 흘리더군요.

△반대로 괴로운 시절도 있었을 텐데요.
-진상보고서가 확정되자 보수단체는 18만 5,689명의 서명을 받아 보고서 취소 헌법소원을 제기했습니다. 입장을 달리하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4·3을 연구해오던 분들이 '반짝 보고서다' '미완의 보고서다'고 폄훼할 때에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위원장이 국무총리이고, 국방장관 등이 위원으로 참여한 위원회를 통과하는 일이 그리 쉬웠겠습니까. 어려운 여건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평가를 받으니 제 자신을 주체하기 힘들더군요.

△그래도 4·3위원회 활동이 다른 과거사 위원회에 비해서 모범적인 사례로 평가되고 있지 않습니까.
-요즘 그런 긍정적인 평가가 나오더군요. 대표적으로 2010년 말로 업무를 종료한 진실화해위원회의 경우 법적으로 재단 설립 근거가 있는데도, 한 발도 못나갔습니다. 그러다보니 위령사업, 사료관 건립, 추가 진상조사 업무 등도 추진할 수 없는 상태에서 위원회가 문을 닫은 거죠. 이에 비하면 4·3위원회 활동이 많은 성과를 거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4·3위원회의 이런 저력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먼저 위원 구성에서 4·3의 역사성에 대해 이해가 깊으신 분들이 많이 참여한 것이 주효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유족회를 비롯한 4·3단체, 도민사회가 4·3의 진실을 밝히고, 화해와 평화로 가자는 데 한 목소리를 낸 것이 큰 힘이 됐다고 봅니다. 그리고 정치적인 환경이 좋았고요.

△국방부 등과도 많은 충돌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국방부와는 진상보고서 시안을 만들 때부터 많은 격돌이 있었습니다. 심한 논쟁을 거쳐 어렵게 보고서를 채택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진상보고서가 나온 직후인 2004년 국방부에서 「6·25 전쟁사」를 편찬하면서 4·3보고서를 완전히 무시해버렸습니다. 제주도 단체와 국회에서 반발하자 청와대 주재로 4·3위원회-국방부 관계자 연석회의가 열렸습니다. 저는 조목조목 반박해 35건을 수정토록 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국방부에서 4·3에 관한 교과서 개정 건의를 해서 물의를 빚은 적이 있는데, 그 부당성을 지적해서 그 건의를 무산시킨 일도 있습니다.

△회고록 연재에 어떤 의미를 두고 계십니까.
-1988년부터 4·3진상규명 운동을 하면서 특별법 제정하라고 촉구는 했지만 실제로 특별법이 제정돼 정부차원의 진상조사를 할 수 있으리라고는 저 자신도 예상치 못했습니다. 불가능해보이던 일을 도민들의 힘으로 이뤄냈고,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성과를 이뤘습니다. 그 과정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김영헌 기자
kimyh@je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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