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역사와 함께하는 제주의 학교] <14> 영평초등학교

▲ 영평초등학교 전경. 김대생 기자

불타 사라진 학교…주민 정성모아 재건
우리동네 생태올레길, 아이들의 힘으로

"옛날 보성의숙, 영평국민학교 모두 마을사람들이 땅 내놓고 돈 모아서 만들었어. 그런데 4·3터지면서 동광양, 남문통, 화북으로 뿔뿔히 흩어졌다 나중에 돌아와 보니 학교가 모두 불타 없어진거야"  영평초등학교 학교육성회장을 지낸 김재환씨(영평동·61)가 4·3당시 상황에 대해 말을 꺼낸다. 당시 마을사람이 열명 넘게 희생돼 어쩔 수 없이 소개령을 따랐지만 돌아온 후 마을의 모습은 처참했다. 가옥 대부분이 불타버렸고, 그 와중에 학교마저 사라져버렸다. 외부의 도움을 기대하기 힘들었던 절박한 상황에서도 주민들은 학교 재건을 뜻을 꺽지 않고 자신들의 땅을 희사하는 것은 물론, 멀리 일본에까지 건너가 재일동포들을 대상으로 모금활동을 펼쳤다. 정성을 모아 학교가 지어진 뒤에도 마을사람들은 감귤원을 내놓고 그 수익금을 학교운영비로 보탰다. 한때 시험지 등사비까지 마을에서 마련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영평초는 주민들과 함께 역사를 만들었다.

# 역사 굴곡에 사라진 학교

'영평·월평 향토지'를 보면 1908년 문맹퇴치 및 농촌청소년들의 계몽을 목적으로 오인방씨 주도로 영평동에 보성의숙(普成義塾)을 설립, 한학과 신학문, 역사교육을 하던 중 일제의 탄압으로 폐지됐다는 기록이 있다. 또 무학년제로 한학을 가르쳤던 보성서당(普成書堂)과 국어, 음악, 체조, 한학 등을 가르쳤던 보성개량서당(普成改良書堂)이 운영됐다는 내용으로 미루어 이들이 학교 설립 이전 교육을 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향토지에는 또 영평초는 김성정·고두원·유성온씨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영평하동 900-27번지 부지를 희사했던 것으로 시작됐다고 적고 있다. 1945년 12월 영평국민학교 설립을 인가받고 이듬해 3월 석조기와집 교실 4개를 준공, 1~4학년 학생 150명을 모집해 수업을 시작했다. 이때 영평상동의 보성의숙에서 공부하던 학생들도 영평교로 와서 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1948년 12월 제주4·3으로 학교가 불타 없어지면서 역사마저 단절될 위기에 처했다. 1949년 10월12일 계엄령 해제후 주민들도 마을로 돌아왔지만 아이들을 맡길 학교가 없었다.

당시 학생들은 아라국민학교를 다닐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광양국민학교까지 걸어서 통학하던 아이들을 보다못한 주민들이 팔을 걷어부쳤다.

1967년 김양희씨를 중심으로 학교건립추진위원회를 조직했고, 마을주민들의 뜻을 모아 부지를 확보해 1968년 3월1일 영평동 현 위치에 교실 2개로 아라국민학교영평분교장을 설립했다. 1978년 김병효·김창호씨가 부지 희사자 등 학교건립에 공헌한 이들을 기려 현 영평초 교문 오른쪽에 송덕비를 세웠다.

1969년 5월15일 '영평국민학교'로 승격해 개교한 후 이후 교실증축과 병설유치원 등 규모를 키우며 1996년 영평초등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지난해까지 모두 1323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현재 6학급 141명이 재학하고 있다.

▲ 영평초등학교 정문 오른쪽에 위치한 학교 건립 유공자 송덕비. 김대생 기자
# 마을 중심에 '학교' 서다

제주4·3으로 학교 뿐 아니라 마을을 잃은 사람들도 많았다. 영평 주민들이 '학교'에 그렇게 공을 들인 것도 마을을 지키고 싶다는 이유가 컸기 때문이다.

여러 이유로 학교가 사라진 현재의 다른 마을에 어떤 결과가 초래됐는지를 보면 이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젊은 세대들이 아이들을 학교 가까이서 통학시키기 위해 시내로 떠나버리고 노인들만 남아 마을을 지키는 곳과 달리 영평동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온다.

특히 한 번 마을을 잃어본 사람들은 그 아픔을 더욱 잘 알기에 제주4·3 같은 환란을 겪은후 재건된 마을들에서는 학교 설립·지키기 움직임이 활발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영평하동에 위치한 영평국민학교 옛 터(배움의 옛 터)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공덕비들도 이같은 치열한 노력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

불 탄 학교건물 대신 작업장이 들어서고 운동장은 현재 주민들의 체육시설로 개조됐지만 학교 건립에 대한 뜻을 기리는 '비' 만큼은 아직까지 제자리를 서서 주민들의 교육의지를 독려하고 있다.

이신익(54) 교장은 "지역주민들의 도움으로 성장한 학교가 이제는 그 열매를 마을과 함께 나누려 노력하고 있다"며 "지역주민 연계 사업을 통해 학교가 이제부터는 마을의 지킴이 역할로써 보답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 영평초등학교 학생들이 ‘예술꽃 씨앗학교’의 일환으로 1인1악기 특별수업을 받고 있다. 김봉철 기자
# 생태올레로 마을과 끈 이어가

이전에는 경제적인 부분으로 학교를 도왔다면, 지금은 아이들과 더불어 마을을 가꾸는 것으로 이어가고 있다.

마을 전체를 휘감는 '우리동네 생태올레'을 만들어 함께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3월부터 11월까지 21명의  생태올레 탐사대 어린이들은 12회에 걸쳐 학교를 시작으로 금산공원과 다라쿳당, 포제단, 수수못, 강한종유적비, 사찰 등 마을내 명소를 돌며 리본과 나무이름표 달기에 여념이 없었다. 9개월간의 노력은 7개 코스·총길이 16㎞ 개발이라는 성과로 나타나 지난해 11월 개장식까지 열게 됐다.

아이들은 생태올레길을 돌며 마을의 환경과 문화, 역사를 이해하고 체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리본을 달며 걷고 즐기는 몇달 동안 올레길도 완벽해지고 내 머릿속 자연도 풍부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걷도록 영평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리고 싶다"는 노유림양의 후기처럼 이제는 마을을 '알리고 싶다'는 욕심까지 생기게 됐다.

'마을'이 든든한 후원자로 자리를 잡다보니 학교의 벽도 낮아졌다. 학부모들과 교사가 힘을 합쳐 경제적인 이유로 아침밥을 거르는 아이들을 위해 따뜻한 정성을 모으고 있다.

'굿모닝 아침밥' 프로젝트로 이름지은 이 사업은  학부모들과 교사가 제주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지정기탁해 학교에서 결식아동에게 도시락이나 빵을 주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자녀들이 칭찬받을 일을 했을 때 기탁금중 절반을 자녀의 이름으로 기부함으로써 아이들에게 단순히 몸의 건강보다는 나눔과 배려의 의미를 깨닫게 하면서 동시에 행동변화도 이끌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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