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훈 변호사

차용증서와 관계된 다음과 같은 예를 가정해 보겠다. A는 5일 후에 B로부터 1000만원을 차용하기로 하고는 미리 5일 전에 차용증서를 작성해 B에게 교부했는데 실제로는 5일 후에 돈이 필요하지 않아 B로부터 1000만원을 차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B는 A로부터 교부받았던 차용증서를 B에게 되돌려주거나 폐기하지 않고 보관하고 있다가 나중에 보관하고 있는 차용증서를 증거로 해 A를 상대로 1000만원을 대여했다고 주장하면서 변제하라는 소송을 제기해왔다.

위의 예에서 법원은 과연 어떤 판결을 할 것인가. 위의 예에서 B는 A로부터 교부받은 차용증서를 보관하고 있는 것을 이용해 법원을 기망해 A로부터 금원을 편취하려는 소송사기를 하는 것이므로 패소당해 마땅하다. 그런데 소송과정에서 A는 B로부터 실제로 돈을 차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합리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 경우에도 법원은 B에 대한 패소판결(B의 청구기각판결)을 할 것인가.
 
증명하고자 하는 법률상의 행위가 그 문서 자체에 의해 이뤄진 경우의 문서를 처분문서(處分文書)라고 하는데, 차용증서, 각서, 계약서, 합의서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법원은 원칙적으로 처분문서의 기재 내용에 따른 의사표시의 존재 및 내용을 인정해야 하고, 그 기재 내용을 부인할 만한 분명하고도 수긍할 수 있는 반증이 인정될 경우에만 그 기재내용과 다른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나라 판례의 태도다. 그러한 법리를 처분문서(處分文書)의 증명력(證明力)에 대한 법리(法理)라 한다.
 
위의 예에서 B가 A로부터 교부받아 보관하고 있는 차용증서는 처분문서다. 따라서 법원은 그 차용증서의 기재 내용을 부인할 만한 분명하고도 수긍할 수 있는 반증이 인정되는 경우에만 그 차용증서의 기재 내용과 달리 B에 대한 패소판결을 할 수 있는데, 소송과정에서 A는 B로부터 실제로 돈을 차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합리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법원으로서는 그 차용증서의 기재 내용과 같이 A는 B에게 1000만원을 지급하라는 내용의 B 승소판결을 할 수 밖에 없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차용증서, 각서, 계약서, 합의서 등과 같은 처분문서를 작성해 교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처분문서가 무효화됐을 경우나 그 처분문서에 따른 의무를 전부 이행하였을 경우에는 교부하였던 처분문서를 반환받거나 상대방으로 하여금 폐기하게 한다면 위와 같은 낭패를 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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