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회복 "공동체에서 답을 찾다"] 3. 마포구 성미산마을

▲ 성미산마을 축제 모습. 사진=가림토 김명집
공동육아로 시작 우리나라 첫 12년제 대안학교 설립
생협·마을기업 등 진화…구역·경계 없는 '마을' 강조
 
"마을 살이란, 생활하면서 자신의 필요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것이며 또한 자신과 동일한 필요를 가진 이웃과 함께 협동하여 해결하려는 시도입니다. 이 과정은 (돈이 없어)시장에서 좌절하고 (관심 없는) 국가로부터 실망한 나머지, 스스로 해결하는 가는 '삶의 필요'를 깨닫는 과정입니다. 나의 필요가 곧 이웃(타인)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함께 협동해야할 이유를 공감해 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성미산 마을 주민의 말을 엿듣다 그만 무릎을 탁하고 쳤다. 흔히 쓰이는 관용어구 하나가 머리를 스쳐간다. '하늘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처음 육아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는 요구에 대처하는 방식은 차곡차곡 쌓이며 감정의 공간을 만들었다. 그들이 말하는 '마을'이다.
 
# 각박한 도시서 '다르게' 살기
 
'성미산마을'이란 이정표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애꿎은 내비게이션을 이리 뒤지고 저리 뒤져도 어디로 가야할지 가르쳐 주지 않는다. '우리는 마을에서 논다'는 거창한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곳에 대한 환상을 내려놓고 보니 단독주택과 작은 빌라들이 모여 있는 전형적인 서민동네가 보였다.
 
성미산마을은 옛 마포구청 청사 뒤에 있는 성미산을 둘러싸고 자리를 잡은 '마을'이다. 애써 '마을'을 구분 지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성산동과 망원동, 합정동, 연남동, 서교동을 망라하는 지역으로 1994년 아이를 맡길 곳이 마땅치 않았던 맞벌이 부부 20여 가구가 뭉쳐 씨앗이 됐기 때문이다. 해발 66m의 동네 뒷산을 생태 놀이터 삼아 아이를 키우는 20년의 시간을 통해 자연스레 형성된 주거 지역이지만 경계도, 구역도 없다. 그러다 보니 그들 스스로도 성미산 마을 구성원이 몇 명인지 모른다. 아이 교육을 핑계로 하나둘 모여든 어른들이 서로 격이 없는 이웃사촌이 되면서 즐거워진 것이 전부다.
 
그랬던 '마을'은 10여 년 전 성미산 지키기 싸움으로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며 알려지기 시작한 뒤 박원순 서울시장이 마을공동체의 대표적 사례로 지목하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마을공동체'를 희망하는 사람들의 방문요청이 잇따르며 주민들의 생활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자 아예 사전 신청을 통해 견학을 제한하고 있기도 하다.
 
성미산 지키기는 최근 '춤추는 숲'이라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재조명되고 있다. 내용이 어찌됐건 그들에겐 그저 살아가는 이야기다.
 
# 필요 발판으로 '마을'을 만들다
 
서울의 보통 서민 동네 이야기가 주목받는 이유는 그들이 '마을'을 만들어간 과정에 있다. 아이 맡길 곳이 필요했던 맞벌이 부부들은 '니 새끼 내 새끼 가릴 것 없이 잘 키우고 행복하고 열심히 살자'는 마음 하나로 어린이집 직접 운영 계획을 세운다. 그렇게 1994년 협동조합을 만들고 출자금을 모은 뒤 그를 밑천으로 어린이집을 개원했다. 우리나라 최초 공동육아 협동조합인 '우리어린이집'이다. 하나둘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이듬해 두 번째 공동육아 어린이집인 '나르는 어린이집'이 만들어진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가 자라자 부모들의 요구도 바뀌었다. 1999년에는 같은 방식으로 방과후 교실을, 그리고 그다음으로 마을학교 '꿈터'를 만들었다. 2004년에는 역시 우리나라 첫 12년제 대안학교인 '성미산 학교'를 설립했다.
 
▲ 성미산마을 지도
아이들이 잘 키우기 위해 친환경 먹을거리 공동구매가 필요해지자 2001년에는 두레생활협동조합(이하 두레생협)을 만들기에 이른다. 두레생협은 조합원 외에도 인근 주민들에게 열린 공간으로 지역사회와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생협에 이어 매년 한 두 개의 마을 기업이 창업했다. 2002년 친환경 반찬가게 '동네부엌'이, 뒤를 이어 마을카페 '작은 나무', 동네 식당 '성미산 밥상'이 주민들의 출자로 만들어져 운영되고 있다. 장애를 가진 마을 청년의 일터 '성미산 공방', 수제 비누를 만드는 '비누두레', 노인들을 돌보는 '돌봄두레' 등 재주는 있지만 작업장을 내거나 취업이 어려운 지역주민들을 위한 사업체가 하나둘 간판을 달았다. 최근에는 대안 공동주택 개념의 '소행주'(소통이 있어 행복한 주택)이 지어져 마을 사람들에게 분양도고 있다.
 
두레생협을 알리기 위해 시작한 잔치는 마을 축제가 됐다. 단오기간에 맞춰 벌써 10년 넘게 성장 중이다. 일 년에 한번 하는 축제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며 날마다 무대를 꾸리고 싶어 하는 이들이 모여 '성미산 마을극장'을 만들었다. 늘 주인공 역할을 하는 동아리도 있다. 동네풍물 '성미상 풍물패', 마을극단 '물뜨네', 아마밴드와 마을합창단, 드로잉 동아리까지 문화 예술로 엮인 모임만 15개가 넘는다.
 
# 단단한 결속력이 만든 '이웃'
 
▲ 마을카페 '작은 나무' 내부 모습. 고 미 기자
성미산'마을'이 던지는 화두는 분명하다. 마을은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듯 함께 살려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마을 살이'라는 말도 그런 취지에서 나왔다. 마을에서 살면서 필요한 부분이 생기면 하나씩 채웠다. 처음 어린이집에서 돌보던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방과후교실이나 마을학교가 요구됐고 아예 지역에서 아이들을 키울 학교가 필요해졌다. 그래서 만들었다. 행정의 요청이 있던 것도, 그렇다고 예산 지원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오로지 주민들의 뜻에 의해 이뤄졌다.
 
안전한 먹을거리에서 출발한 두레생협이 지역 마을기업 육성으로 이어졌고, 마을축제는 지역 문화예술동아리를 키웠다. 어느 하나 이어지지 않은 고리가 없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단단한 결속력은 깊고 넓게 뿌리 내려 '마을'을 만들었다. 감정적 공유를 통해 만든 이웃문화다.
 
요즘 자치단체들이 경쟁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마을 만들기와는 태생부터가 다르다. 뭔가를 치장하기 보다는 속을 채우고, 하나라도 더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인다. 사람들 사이의 거리가 좁아진 만큼 마을은 즐거워진다. 그들이 마을에서 노는 이유다. 고 미 기자

인터뷰 / 김 우 ㈔사람과 마을 운영위원장

성미산마을 운영 전반을 망라하고 있는 ㈔사람과 마을 김 우 운영위원장(누니)가 일러준 것도 주소가 아닌 상호다.

급한 사정으로 약속 시간을 조금 늦춰달라는 부탁을 냉큼 받아들인 것은 상호 속 세상을 하나하나 만나고 싶은 욕심이 컸다.

김 운영위원장은 직함이 많다. 울림두레생협 이사장이자 두레생협 연합회 대표도 맡고 있다. 사회활동가도 아닌 보통 주부였다는 말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많은 일을 하고 있지만 그 역시 공동육아의 수혜자였다.

김 운영위원장은 "둘째를 키우면서 시작된 육아 스트레스로 고민을 하다 공동육아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고 성미산 마을로 오게 됐다"고 말했다. 그것이 2004년의 일이다. 이후 공동육아어린이집을 거쳐 마을 안내팀인 '길눈이'역할을 자원하면서 마을살이에 관여하게 됐다.

마을은 점점 커지고 있다. 그만큼 할 일도 많아졌다. 운영위원장이란 역할을 맡게 된 이유는 생각외로 단순했다. "낮에 시간이 비는 사람이 필요했어요. 큰 일이 있을 때는 그에 맞춰 집행위원회 같은 것이 구성되니 특별히 할 일도 없고요. 그저 사람들이 말을 들어주는 역할이라고 보면 되요"

성미산마을은 월별로 할 일이 참 많다. 1월 새해를 열고 나면 2월에는 지신밟기를 하고 3월에는 성미산에 나무를 심는다. 5월은 단오에 맞춰 마을의 가장 큰 행사인 축제를 연다. 7월 성인식에 10월 가을운동회, 12월 송년회까지 마치고 나면 정신없이 1년이 간다. 중간 중간 정보소통한마당이며 하소연대회처럼 서로간의 의견을 묻고 듣는 자리도 있다.

'마을에서 논다'는 주변의 반응에 김 운영위원장은 "단순히 놀이의 개념이 아니라 실현의 의미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차별보다는 차이를 인정하고 관계 맺음이 자유롭지만 모든 전제는 서로가 필요하고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
김 운영위원장은 "이제는 팀을 나눠 연말모임을 할 정도니 마을이 커지기는 분명 커졌다"며 "그래도 모임이나 협동조합별로 운영위를 통해 사업 등을 결정하고 책임지는 기준은 지키고 있다. 그것이 공동체를 지탱하는 힘"이라고 강조했다. 고 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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