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음식이 경쟁력이다]
4. 가을, 신선한 갈치와 호박의 최고 궁합

▲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가을밥상·흐린조팝·갈치국·고등에국.「전통향토음식」발췌
조팝에 갈치호박국, 싱싱한 재료맛으로 입맛 돋워
전통음식 보존 외 코스화된 세트요리 중요성 부각
 
보릿고개를 넘어 곡식이 여물기 시작하는 가을, 과거 어려운 시절 속에서도 잠시나마 풍요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바다와 가까운 제주에서는 필연적으로 '생선'이 자주 밥상에 올랐으며, 제주사람들은 매운탕이나 찜, 조림 대신 간단히 요리할 수 있는 생선국을 선호했다. 어느 지역보다 다양한 제주의 생선국은 어려운 시절 양질의 단백질을 공급해주던 고마운 존재이자, 요즘 들어서는 미식가들의 입맛을 돋우는 제주의 대표음식으로서 가능성을 평가받고 있다.
 
# 풍성한 가을, 갈치국이 제맛
 
수확의 계절 가을, 제주에서는 열매에 속하는 종류와 신선한 해산물이 밥상에 자주 올랐다.
 
그중에서도 가을이 제철인 갈치와 노란 호박이 어우러진 갈치호박국은 "가실(가을) 갈치에 가실 호박이 최고로 맛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최상의 궁합으로 꼽힌다. 추석이 지나면서부터 노랗게 익은 가을호박에 살이 통통하게 오른 갈치를 넣어 국을 끓였다. 특히 제주 갈치는 은갈치로 9~10월에 많이 잡히는데, 이때부터 제대로 맛이 들기 시작한다.
 
갈치는 어종 특성상 지방이 많아 싱싱하지 않으면 비린내가 나기 때문에 육지부에서는 주로 조림을 해서 먹었지만 제주는 가까운 바다에서 싱싱한 갈치를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국으로 끓여도 문제가 없었다.
 
갈치호박국에서는 제주음식의 가장 큰 특징인 '간단한 조리법'과 '제철에 나는 싱싱한 재료의 맛'이 두드러진다. 늙은 호박을 큼직큼직하게 썰어 미리 익힌후 갓 잡아올린 갈치와 얼갈이배추를 차례로 넣고 끓이는데, 양념이라고는 청장과 마늘, 소금, 후추 정도가 전부였다.
 
제주도가 최근 발간한「제주인의 지혜와 맛 - 전통향토음식」에 따르면 호박의 베타카로틴은 체내에서 비타민 A가 되어 점막을 강화하고 거친 피부나 감기를 예방하며, 야맹증이나 눈의 피로한 증상을 예방하는 작용을 한다.
 
고등어 역시 가을부터 겨울이 제철로, 배추와 함께 갈치국 끓일 때와 비슷한 양념으로 '고등에국'(고등어국)을 끓여 먹었다. 고등어는 지방함량이 풍부하며, 불포화 지방산의 함량이 높아 심혈관계 질환의 예방과 치매·암 예방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 콩주름양엣간무침, 멜조림, 멜첫 등 부식과 우영팟에서 키운 부루, 세우리 등 쌈채소가 밥상에 함께 올랐다.
 
주식의 경우, 타 지역은 흰쌀밥이 주식이지만 제주 지역은 논이 없어 서민층에게 곤밥(쌀밥)은 제사 때 정도나 구경할 수 있는 귀한 것이었다. 때문에 가을부터 겨울까지는 조팝(조밥)을 먹었다. 좁쌀은 에너지 밀도가 높은 뜨거운 음식으로 추울 때는 조팝으로 열을 보충하는 역할을 했다. 조팝은 또 빨리 익기 때문에 급하게 밥을 해야할 때 즉석식품처럼 먹기도 했다.
 
반면 무더운 여름에는 보리밥을 해먹었다. 보리는 찬 음식으로, 여름에 먹으면 좋다고 한다.
 
고정순 제주향토음식문화원 원장은 "어떻게 보면 환경적 요인으로 보리밥과 조팝을 먹은 것이었지만 음식과 계절의 궁합이 맞아떨어진 것으로도 볼 수 있다"며 "요즘은 주구장창 현미밥·잡곡밥만 먹는데, 이는 어찌보면 음식 고유의 성질을 무시한 셈이 된다"고 말했다.
 
# 코스화·상품화 전략 고민 시점
 
▲ 그랜드호텔내 식당에서 요리사가 감귤피자 요리를 위해 반죽을 펴고 있는 모습(왼쪽)과 중국인관광객이 감귤케익을 접시에 담고 있는 모습.
관광지 맛집을 중심으로 갈치호박국과 각제기국 등 전통 국요리의 명맥을 이어가고는 있지만 예전처럼 즐겨먹는다고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나마도 관광객들이 선호하는 매운탕, 찜, 조림에 밀려나지나 않으면 다행인 실정이다.
 
또 제주음식은 육지식과 혼합된 정체불명의 음식으로 탈바꿈해왔으며, 이제는 토박이조차 제주의 전통음식으로 착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의미에서 전통을 유지해왔던 제주음식이 '관광'이라는 새로운 조류와 만나면서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지적은 일견 수긍이 가는 주장이다.
 
하지만 관광객들에게만 모든 화살을 돌릴 수는 없는 이유도 분명히 있다. 제주음식을 그 자체로 상품화하지 못하고 관광객들의 입에 맞춰 육지부의 맵고 자극적인 양념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인 게 바로 우리의 관광음식점들이었기 때문이다.
 
전통을 유지하며 여러사람의 입맛에 맞출 방법은 없는 것일까.
 
'개발'과 '보존' 측면에서 보면 제주 전통음식은 청정 이미지를 갖고 있는 대신 '슬로우 푸드'로 총칭될 만큼 조리시간이나 제철재료 등에 있어 상품화가 어려운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때문에 앞서 제시했듯이 일부는 명품화해 관광객 등을 겨냥하고, 일부는 대중화를 통해 도민과 관광객 모두가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방안이 될 수 있다.
 
문동일 제주그랜드호텔 조리부장은 부식 중심 메뉴의 한계를 지적하며 코스화된 '세트 요리'를 돌파구로 제시했다.
 
문 조리부장은 "전통음식점은 메뉴별로 향토음식점을 지정해 지원을 강화하는 쪽으로 보존에 무게를 두어야한다는 생각이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하다"며 "추후 세계화를 위해서라도 제주 대표음식으로 부식보다는 고기요리·생선요리 전문점 등과 같은 코스화된 주식 요리를 키워야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이어 "코스요리를 구성할 때, 맵고 짠 김치를 먼저 먹으면 주요리의 식감을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에 기본찬은 주요리가 나올때 3가지 정도만 내오는 것이 좋다"며 "샐러드-부침개·잡채·튀김·죽 종류-주요리-차·과일 등 후식 순으로 코스를 구성한다면 원가도 적게 들고 음식맛도 제대로 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 특별취재팀=김봉철·고혜아 교육문화체육부 기자

 

인터뷰 / 문동일 제주그랜드호텔 조리부장
 
제주그랜드호텔 조리부장이자 제주관광음식연구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문동일씨는 "제주에서 나는 재료를 사용하되, 너무 제주적인 것만 고집하지 말고 다양한 조리법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스스로를 '개발론자'로 부르는 문 조리부장은 "물론 전통음식을 보존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고 선을 그으면서도 "대중화라는 측면으로 봤을때, 다양한 방문객들의 입맛에 맞춘 '세계화된' 제주음식 개발도 필요하다는 이야기"라고 밝혔다.
 
그는 "예를 들어 현재 제주를 많이 찾고 있는 중국인관광객들을 위해 중국음식을 준비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취향대로 생선을 통으로 튀기거나 굴·두반장 소스를 얹는 식"이라며 "행정에서는 어떻게 생산해서 홍보할 것인가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누가 먹을 것이냐'이다. 소비자의 기호를 파악하는 것이 대중화의 첫째 조건"이라고 피력했다.
 
문 조리부장은 "현재 호텔내 식당에서 진행되고 있는 '제주 식도락여행' 이벤트도 투숙객 1000명에게 설문을 통해 선호 음식을 미리 파악해둔 결과 반응이 좋았다"며 "조사결과대로 도두항 한치물회, 한림항 고등어회, 동복리 회국수, 우도 보말죽 등 도내 유명음식 10가지를 선정해 메뉴를 만들었고, 원할 경우 현지를 직접 찾아가서 그곳 음식을 맛볼 수 있도록 안내도 해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음식점 밖에서의 대중화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소스' 개발을 먼저 꼽았다.
 
문 조리부장은 "제주만의 소스를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행정의 정책적인 노력이 부족하다"고 꼬집으며 "일례로 자리물회에 들어가는 된장소스를 잘하는 식당이나 요리연구가에게서 권리를 사들여 보급한다면 물회를 할줄 모르는 사람들도 집에서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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