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등동공동목장은 잘 개간된 초지와 현대화 축사를 갖춘 개인목장에 비해 곳곳에 찔레덤블과 삼림 등이 혼재된 '공동목장'만의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물 저장소·급수시설·약욕장·켓담 등 옛 모습 보전
1971년 조합 명의 등기…토지 기증자 공로비 건립
제주시 오등동마을회관에서 애조로를 가로질러 한라산 방면으로 달리기를 20여분. 좁은 길 끝에 철문을 경계로 70만여㎡ 드넓은 오등동공동목장이 펼쳐진다. 잘 개간된 초지와 현대화된 축사를 갖춘 개인목장에 비해 곳곳에 찔레덤불과 삼림 등이 혼재된 '공동목장'만의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산 중턱이지만 평평한 암반지대인 '빌레'지형 위에 형성돼 자연적으로 습지와 초지를 갖췄고, 암반에 물이 고이면서 생긴 너른 연못들만 5곳에 달해 천혜의 목장 입지로 손색이 없는 곳이다. 세종 12년 만든 10소장 중 하나인 3소장, 현재의 오등동공동목장이다.
켓담부터 바령밭까지 원형 유지
"예전에는 집집마다 쉐막이 다 있어서 한두마리씩은 길렀지. 그 때는 한 달에 두 번씩, 돌아가면서 2명이 먹을 것 들고 목장에 올라가서 우물물 먹으면서 마소를 지켰어"
오등동공동목장 총무를 지냈던 전태일씨(77·제주시 오등동)에 따르면 주민 대부분 소를 키우던 당시 목장 관리는조합원 공동의 몫이었다.
4월 중순 소를 올려보내기 전 초지 개간부터 시작해 흙이 쌓여 좁아진 물웅덩이를 준설해 넓히는 작업, 켓담(목장의 경계를 구분하는 돌담)을 추스르는 등 정비작업을 매해 함께 했다. 이때 집집마다 인력을 보내는 것을 '출력'이라 했는데, 이를 3번 이상 어기면 조합에서 제명할 정도로 규약은 엄한 편이었다.
가장 큰 골칫거리는 간혹 소들을 죽음에 이르게까지 하는 '진드기'였다. 진드기를 구제하기 위해 소 놓기 전 방앳불 놓는 작업은 물론 약욕장에서는 물에 탄 구제약을 천에 묻혀 발라주는 작업이 이뤄졌다. 4·3 이전에는 진드기들을 피해 보다 높은 개미목으로 올라가기까지 했다. 옛 사람들은 이를 '상산 올린다'고 했다.
물 문제는 자연적인 연못 외에 1983년 안둘리 327번지에서 산 162번지를 거쳐 산 61번지 목장관리사까지 수도시설 860m를 가설하며 완전히 해결됐다. 현재 공동목장에는 당시 테우리들이 묵었던 목장관리사와 소에게 먹이기 위한 급수시설, 물 저장소, 약욕장, 켓담 등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밤에 마소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한 곳으로 몰아넣었던 바령밭 역시 목장 왼켠에서 접할 수 있었다. 바령밭은 축산분뇨를 거름으로 쓰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오등동공동목장에서는 야간에 마소를 지키는 목적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멤쇠'로 송아지 불려나가
예전부터 소는 큰 재산이었다. 특히 밭일에 필수인 '밭갈쇠'는 한 마리면 1500평 땅을 산다 할 정도로 귀했다. 소를 먹이기 위한 촐왓 역시 일반 밭보다 비싸 '촐왓 가지면 부자'라는 말이 있었다.
때문에 너나 할 것 없이 가난했던 시절, 마을에는 큰 돈 들이지 않고도 송아지를 가질 수 있었던 '멤쇠'풍습이 유행했다.
이는 소주인이 관리인에게 암소를 맡기고 태어나는 송아지를 번갈아 나눠갖는 방식으로, 제주4·3을 겪으며 소 한마리 남은 게 없을 정도로 초토화된 마을 축산업을 다시 일으킨 것도 이 멤쇠 덕택이다.
전태일씨의 기억에 의하면 오등동에서는 양모씨 소유의 소들이 멤쇠로 마을내 소 증식에 큰 역할을 했다.
낙인을 찍는 작업은 조밭에서 조밭볼리기(밟기) 작업을 겸해 이뤄졌다. 하동의 낙인은 '吾木'(오목)을 15x5㎝ 정도 크기로 세로로 썼다.
다른 마을에서 주인 없는 말이나 소를 발견할 경우, 사람들은 마을 낙인을 보고 제 주인을 찾아줬다. 하지만 현재는 거의 쓰이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7월 백중에 우마번성을 기원하며 지냈던 백중제(테우리멩질)는 음역 7월14일 자정을 기해 집집마다 하던 것을 공동목장 형성후에는 목장관리사 앞에서 함께 지내는 것으로 바뀌었다.
▲ 1976년 건립된 공로비(사진 왼쪽)와 자연적으로 형성된 연못(오른쪽).
형성과정서 우여곡절도
공동목장조합이 탄생한지는 오래됐지만 공동목장 형성과정에서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오등동향토지」에 따르면 이곳 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하잣성에서 중잣성 사이 오등동 목장을 목야지로 이용해왔고, 세월이 흐르며 아라, 도남, 광양 등지의 사람들까지 100여명으로 늘었지만 토지가 미등기 상태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소가 방목되는 곳이 자신 소유의 토지인줄 알았던 주민들은 일제강점기 이후 1966년까지도 이곳을 공동목장으로 알고 가축을 방목해왔다.
하지만 1969년 정윤승 9대 조합장이 확인해본 결과 300여 정보가 외지인 소유인 상태였다. 이에 조합은 2~3명만 반대해도 매각이 불가능하도록 공동목장 명의 등기를 위한 추진위원회를 구성, 상속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목장 이전 서명을 받았다.
이들의 노력으로 결국 32명의 승인을 받고, 1971년 12월20일자로 해당 토지를 조합 명의로 등기하는 성과를 거둔다.
조합은 상속자이면서도 토지를 기증한 이들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증토비를 세우기로 결정, 조합원 67명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1972년 오등동 입구에 증토비를, 1976년에는 목장 중심지에 공로비를 건립했다. 김봉철 기자
오등공동목장조합은 제주읍공동목장연합회장이 제주도목장조합중앙회장에게 보낸 문서를 보면 1934년 5월20일 제주도사(濟州島司)로부터 설립인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943년 당시 조합원은 230명이었으며, 오등리, 도남리, 이도리(2구), 아라리(1구) 주민들이 조합원들이었다. 4개 마을 주민들이 힘을 모아 하나의 목장조합을 만들어 우마를 공동방목한 것이다.
'공동목장이용상황조사표'(1943)에 따르면, 이 목장의 입목두수(소)는 560두, 면적은 매수지 29정보, 기부지 148정보, 차수지 232정보로 총 410정보였다. 62명(아라리 12명, 오등리 50명)의 조합원이 본인 소유의 토지를 오등목장조합에 기부했으며, 부족한 목장용지는 28명(아라2, 도남리5, 이도리1, 오등리 20명)으로부터 빌리거나 제주읍 소유의 읍유지(8정보)를 임대해 목장용지로 이용했음이 확인된다.
「일제시기 목장조합연구」(2013)에 따르면, 이 조합은 사유지형, 차수형 목장조합이었다. 이 공동목장의 조합원들은 4월 중순께부터 10월 중순까지 공동목장(해발 350~450m에 위치)에 소를 방목했으며, 겨울철에는 추석을 전후해 하늬바람이 터질 때 공동목장 주변, 마을인근 오등봉(해발 206m)에서 촐을 베어 말린 다음 '쉐막'에서 소를 길렀다. 병문천 곳곳에 존재했던 물 웅덩이들은 가축들의 급수장으로 이용됐다. 번쉐·멤쉐·낙인·귀표·백중제·바령밭·상산(개미목) 방목 등의 목축문화가 이 마을에도 존재했다.
전재구 조합장은 "오등동에서 언제부터 목축이 이뤄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3소장 설치 이후 대대로 가축을 사육한 사실은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며 "우리들이 꼭 지켜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할 소중한 유산"이라고 강조했다.
전 조합장은 "하지만 현재는 목축을 하고 있는 조합원이 거의 없어 공동목장을 유지하기 위해 지역의 사업과 연계하는 방안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지역의 공동목장이 주민들에게 직접적으로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관리·운영하는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올해는 전국 첫 말산업 특구 지정으로 말산업과 연계하기 좋은 시기를 맞고 있다"며 "또한 제주시권과의 접근성도 매력적인 만큼 관광목장으로서의 가능성도 높게 보고 있다"고 피력했다.
전 조합장은 "이를 위한 선결과제는 행정의 규제 완화"라며 "승마장 등을 유치하려 해도 제주시 동 지역 개발규제로 인해 화장실 설치·오수처리 등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동 지역 전체에 대한 규제완화는 무리겠지만 공동목장 보전을 위해서라도 조례 등으로 지역주민들에 의한 관광목장화 정도의 길은 열어줬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김봉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