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마을공동목장사] 3.유수암공동목장 ①

방풍림·윤환방목 구획·관리사 등 옛 모습 그대로
지역적 특성 반영한 '밭갈쇠' 등 관련 풍습도 눈길
제1산록도로(1117번)를 따라가다 창암재활원 입구로 들어서 200여m만 더 가면 바로 100만㎡에 가까운 드넓은 초지가 펼쳐진다. 개량초지로 잘 정비된 목장 안으로 들어서면 멀리 한라산과 어승생악, 가까이는 족은노꼬메오름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아래로는 탁트인 바다까지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곳은 목장이라기보다 오히려 '산책코스'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여유로운 목가적 풍경이다. 80년 세월 동안 마을공동체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됐던 유수암공동목장에 대해 현재 남아 있는 지역의 전통 목축문화와 '어떻게 보전할 것이냐'에 대한 고민을 두 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제주 목축유산 고스란히 간직
유수암마을 남쪽 일대 9필지·91만6230㎡에 걸쳐 형성된 유수암공동목장은 오랜 세월을 겪으면서도 근대 제주 목축의 모습을 고스란히 잘 간직한 목장이다.
기본적인 급수시설과 약욕장, 목장관리사 등이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고 윤환방목을 위한 구획정리도 확실히 돼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윤환방목'은 목장 안 구획을 나눠 돌려가며 방목하는 목축방식으로, 유수암목장에서는 1974년 초지개량과 함께 목장 안에 경계를 가르는 측백나무 등을 심어 4개 구역으로 나눴다. 조성 과정에서 덤불 제거, 지주목 세우기, 방풍림 조성, 돌담 쌓기 등 마을 사람들의 수고가 대단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당시에는 너나 할 것 없이 열심이었다.
한 구역당 15~20일 방목으로 최소 45일 주기의 윤환방목을 실시하면서 소들은 항상 잘 자란 풀을 먹을 수 있게 돼 생산성도 크게 향상됐다.
이에 따라 집집마다 소 1~2마리 기르던 것이 1970년대부터는 가구당 5~6마리, 많게는 10마리까지 소를 기르게 돼 마을 전체에 소가 400마리를 넘는 등 목축 전성기를 맞게 된다.

가축이 늘어나면서 목장을 지키는 '목감'들의 역할도 그만큼 중요해졌다.
이들은 목장에 마소를 올릴 때부터 쭉 목장관리사에 거주하며 가축을 돌보는 한편, 마소가 올라온 날을 기해 목장 관리사 안에서 목축신에게 올리는 제를 준비하는 역할도 맡았다.
이와 함께 목장 안에는 물을 저장하는 저장고가 현재까지 남아있지만 수도시설이 들어오기 전 물을 먹이기 위해 팠던 우물 2곳은 사용하지 않다보니 점차 그 흔적이 사라지고 있어 아쉬움으로 남는다.
밭갈쇠 하루면 김 매기 사흘
"밭갈쇠 한 번 빌리젠 허믄 주인 밭이 사흘을 김 매줘야 했주. 경운기 어실 때는 쇠가 곧 재산이라"
강철호 유수암공동목장 조합장의 말처럼 유수암리가 속한 서부산간지역은 특히 황소의 가치가 상상 이상으로 높았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이는 동부지역에 비해 땅이 척박해 암소나 말로는 밭을 갈기 어려웠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마을의 기록에서도 잘 드러난다. 유수암리 향토지인 「유수암리지」를 보면 '우리 마을 밭이 어기어 암소나 말로 밭을 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황소를 '밭갈쇠', 암소는 짐 실을 때나 쓴다고 해서 '짐쇠'라 불렀다'는 대목이 나온다. 때문에 이 지역에서는 밭을 가는 데 필수적인 밭갈쇠 한 마리의 가치가 당시 밭 3300㎡(1000평)에 해당할 정도로 큰 재산이었다.
황소의 중요성 때문인지 이와 관련한 풍습도 많이 전해지고 있다.
밭갈쇠가 없는 집에서는 소를 한 번 빌리기 위해 돈을 주는 대신 3일간 김매기 등 노동력을 제공했고, 또 청촐이나 보릿겨를 사료로 제공하기도 했다. 특히 4·3 광풍이 마을을 휩쓸면서 남자와 소가 많이 없는 상황이었던 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밭갈쇠로 키우기 위한 훈련인 '새 쇠 고르치기'는 숫소가 2~3살 될 때부터 시작했다. 봄이 되기 전 멍에를 씌운 후 가벼운 소나무 가지 등을 끌고 매일 마을을 한바퀴씩 돌고, 익숙해지면 노는 밭을 갈게 했다. 이 마을에서는 이를 '밭을 번한다'고 했다. 여기서 꼭 필요한 과정이 코뚜레를 뚫는 일로, 이 때가 되면 마을 장정 여러명이 동원돼 소를 쓰러트리고 발을 묶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같은 풍습은 현재는 거의 찾아 보기 힘들다. 1970년대까지 노동력과 재산 목적이었던 소의 가치가 농기계 보급으로 점차 비육 목적으로 변화한 데다 1983년 소값 파동 등으로 마을내 축산농가도 많이 줄었기 때문이다.
사라져버린 전통, 방앳불 놓기
유수암 마을에는 당시 도내 목장에서 보편적으로 행해졌던 '방앳불 놓기'(화입)에 대한 기억도 비교적 상세히 남아있었다.
강철호 조합장과 강용택 총무의 기억에 의하면 방앳불 놓는 작업은 초봄 소를 올리기 전, 목장에 눈이 녹아 없어지고 건조하며 바람이 없는 날 하루를 잡아 조합원들이 공동으로 진행했다.
방식을 보면 먼저 풍향을 살피고 바람이 불어오는 반대편 끝에 수 m 폭의 방화선을 판 후 조심스레 불을 놓았다. 출력에 나선 마을 사람들이 방화선을 넘어온 불을 끄며 어느 정도 방화선이 넓어지면 반대편과 중앙에도 불을 놓고 완전히 소화될 때까지 지켜보는 식으로 이뤄졌다.
유수암리에서 마지막으로 방앳불 놓기가 행해진 시기는 1972년인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당시 축산농가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목장내 진드기들을 구제하고, 소들에게도 새로 자란 연한 풀을 먹을 수 있게 했다.
제주 사람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의미있는 축산 전통이지만 정부의 산림보호 정책으로 단절됐다. 자칫 산불로 번져 산림이 소실되고 환경이 파괴된다는 이유에서 1970년대부터는 자기 임야에 불을 놓은 농민이 산림법 위반으로 검찰에 구속되기도 하는 등 논란이 많았던 무렵의 일이다. 심지어 당시 당국이 6대 폐습으로까지 규정, 대대적인 추방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현재는 새별오름에서 재현한 들불축제를 통해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수준이다.
하지만 제주의 독특한 목축문화로서의 가치가 있는 만큼 이에 대한 기록을 수집하는 등 체계적 연구가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김봉철 기자
▲자문단=강만익 문학박사(한국사)·문화재전문위원, 좌동열 문화관광해설사
▲자문단=강만익 문학박사(한국사)·문화재전문위원, 좌동열 문화관광해설사

1943년에 이 공동목장의 조합원은 175명이었으며, 이들은 모두 금덕리 주민들로, 1개 마을 주민들이 힘을 모아 하나의 목장조합을 만들어 운영했던 사례이다. '공동목장이용상황조사표'(1943)에 따르면, 이 목장의 면적은 산 27번지 63정보, 산 103번지 10정보, 산 104번지 5반7무 등 총 75정보였으며, 24명의 토지 소유주들로부터 목장용지를 매입해 공동목장을 구성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목장들처럼 기부지를 받거나 국유지나 읍유지를 빌려 이용한 것이 아니라 모두 사유지를 매입해 목장을 운영한 것이 특징이다. 일제식민지 당국(국유지)이나 애월면 소유의 땅(면유지)에 의존하지 않고 순수 마을주민들의 힘으로 목장용지를 확보해 운영했다는 점에서 목장조합의 가치를 높게 평가할 수 있다. '일제시기 목장조합연구'(2013)에 따르면, 이 조합은 전형적인 사유지형, 매수형 목장조합이었다.
김봉철 기자
bckim@jemi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