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마을공동목장사] 6.삼리공동목장 ①

한때 대규모 목축…돌로 지은 테우리막 소실 아쉬움
평화로를 타고 달리다 보면 새별오름 맞은 편 샛길로 동쪽 650m 지점에서 삼리공동목장 팻말을 찾을 수 있다. 진입로를 따라 올라가니 얼마 지나지 않아 목장 중심부에 다다른다. 산정호수를 연상케 하는 넓은 저수지를 중심으로 괴오름과 다래오름, 바리메오름과 족은바리메오름들이 목장을 병풍처럼 두른 편안한 풍경속에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을 수 있는 천혜의 목장이다.
봉성·곽지·금성리 합심으로 탄생
'삼리'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삼리공동목장은 도내에서 유일하게 3개 마을이 힘을 모아 만든 공동목장이다. 제주시 애월읍 봉성리(옛 어도리)와 곽지리, 금성리가 이에 해당한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제주지청이 제주 지역 전체 목장을 마을별로 나눌 때 삼리는 속칭 '흘축밭'으로 불리던 6소장을 배정받았다. 봉성리 일대 231만㎡에 달하는 넓은 초지대였다.

이 과정에서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조합에서는 한 마을의 조합원이 2년 임기의 조합장을 맡을 경우 총무·재무를 각각 마을별로 안배하도록 정관에 정해 놓는 방법을 통해 조화를 꾀했다. 이같은 전통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목축은 아무래도 목장에 가까운 중산간 마을인 봉성리에서 활발하게 행해졌다. 이 마을 주민들은 많게는 50~100마리에 달하는 소를 키우기도 했고, 적은 집도 1~2마리씩은 키우고 있었다.
소는 밭갈이에 이용되기도 했지만 송아지를 사서 키운 후 되팔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
한때 300여호에 이르렀던 축산농가는 현재 5호 수준으로 줄었고, 조합은 이들에게 목장을 임대해 준 수익으로 운영되고 있다.
삼리공동목장의 목축 풍습
삼리공동목장 주변 지역에서는 5월에 소를 올려 12월에 되몰아왔다. 목장에 눈이 내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소들은 오름에 올라가거나 나무 밑으로가 눈을 피했다고 한다. 식수는 1980년대 어승생 물을 끌어오는 수도공사를 하기 전까지 하천의 물만 먹였다.
희망자를 받아 뽑은 목감에게는 소 1마리당 1년(6~8월)에 보리 닷말을 대가로 줬다. 목감들은 다른 공동목장들처럼 목장에 올라갈 때 목축신에게 마소의 건강을 기원하는 백중제와 비슷한 성격의 제를 올리는 역할도 맡았다.

진드기 등 해충과 묵은 풀·덤불을 없애기 위한 방앳불을 놓기 위한 풍습은 없었다고 전해진다. 주민들이 주변 촐왓에 불을 붙이다 보면 자연적으로 목장에도 불이 옮겨붙었고, 당시에는 나무들이 적어 큰 불로 번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김봉철 기자 ▲자문단=강만익 문학박사(한국사)·문화재전문위원, 좌동열 문화관광해설사.

현재 삼리공동목장은 해발 500m일대 봉성리(옛 어도리) 초지대에 위치하며, 새별오름 맞은 편 평화로에 인접해 있다.
1930년대 들어와 6소장 국마장 지역에는 어도리와 금악리 마을공동목장이 등장했다. 1943년 애월면공동목장연합회장이 제주도목장조합중앙회장에게 보낸 「공동목장지이용상황조사에 관한 건」에 따르면, 이 목장조합은 1937년 6월10일 제주도사(濟州島司)로부터 설립인가를 받아 형성됐다. 1943년 당시 조합원은 575명으로, 조합원들은 어도리, 곽지리, 금성리 삼리 주민들이었다. 3개 마을 주민들이 힘을 모아 하나의 목장조합을 탄생시킨 사례였다.
「공동목장이용상황조사표」(1943)는 이 조합의 목장용지가 매수지와 차수지로 구성됐음을 보여준다. 차수지는 임대료를 지불하며 이용하는 토지로, 애월면 소유의 면유지를 빌렸다.
어도리 산 52, 55, 69, 71번지 총 140여 정보에 해당하는 애월면 면유지는 이 마을 공동목장조합에서 임대해 확보한 것이다.
면유지는 본래 일제가 면사무소 운영에 필요한 자본을 마련하기 위해 토지조사사업(세부측량) 후 미신고된 토지의 일부를 면사무소 소유로 넘기면서 등장한 토지였다. 다른 목장조합의 목장용지에 나타나는 국유지와 리유지가 없었으며, 대부분 사유지를 매입해 공동목장을 조성했다.
매입지는 어도리 주민 11명과 귀덕리 주민 1명이 소유한 땅이었다. 현재는 공동목장을 조합원 등 축산업자들에게 임대해 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