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마을공동목장사 - 16. 고성1리목장<2>

 

   
 
  ▲ 고성1리에는 곰돌을 끌어 농사를 지었던 기술인 밭고리치기 등 테우리를 지냈던 이들로부터 목축기술들이 전승돼왔다. 문석하 고성1리 목장조합장(왼쪽)이 마을공동목장사 자문단 앞에서 곰돌을끄는 밭고리치기 를 설명하고 있다. 김봉철 기자  
 

'밭 고리치기' 등 전승…목축의례·민간요법도
높은 보존가치 비해 체계적 수집·활용은 감감
소멸위기 속 테우리 기억 의존 재현 작업 시급

고성1리에서는 테우리를 지냈던 이들로부터 마을에 구전돼온 목축기술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소와 농사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인 만큼 농사와 관련된 도구와 기술도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이곳의 목축문화 역시 사라질 위기라는 점에서 목축문화와 문화재 보전 차원의 고민이 더해지고 있다.

#'밭 고리치기'에 깃든 옛 지혜

"쇠가 밭갈 나이쯤 되면 장기(쟁기) 끌기 전에 곰돌 끌멍 훈련시켰어. 쇠가 고닥고닥 몸부림 안칠 때쯤 되면 다 된거라"

문석하 고성1리목장조합장(74)은 마을 테우리와 농가들 사이에서 행해진 밭갈쇠를 다루는 기술인 '밭 고리치기'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밭 고리치기'는 먼저 멍에에 쟁기 대신 작은 항아리 크기의 돌덩이인 '곰돌'을 끄는 훈련으로 시작한다. 삼각 모양인 곰돌은 끝 부분에 구멍을 뚫고 나무를 넣어 새끼줄로 멍에에 연결했다.

밭갈쇠는 며칠간 곰돌 끄는 훈련을 받은 후 점점 큰 소나무 가지도 끌면서 밭 가는 일에 익숙해지도록 했다. 소는 성격에 따라 처음에 몸부림치며 반항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일주일이면 잠잠해져 농사일에 동원되게 된다.

쟁기를 처음 끌 때는 농사일이 끝나고 해질녘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두 사람이 앞에서 끌고 뒤에서 봐주며 훈련시켰다.

특히 날이 어두워져서야 멍에를 풀어주는 일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해가 져야 일이 끝나는' 농사 주기에 소들도 순응하도록 하는 것이다. 소와 함께 삶을 이어온 옛 테우리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소가 병에 걸렸을 때 마을에서 행해지던 민간요법도 전해진다.

마을마다 '쇠침 주는 하르방'이 있어 창 모양의 장침을 등과 다리옆, 뒷다리에 찌르면 병이 나았다든가, 발가락에 발거림(염증)이 생기면 짚으로 훑어주는 등의 전통요법이다.

 

   
 
  ▲ 문석하 조합장의 자택 창고에 남아있는 전통 농기구.  
 

# 곰돌·멍에 문화재 보존 필요

문석하 조합장의 자택 창고에는 밭갈기에 사용된 쟁기와 멍에, 밭갈기 훈련에 쓰인 곰돌, 뜨거운 햇볕을 피하기 위한 대패랭이 등 옛 농기구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곰돌 등은 농기계 보급이후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것들이지만 제주 목축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문화재로 평가된다.

하지만 높은 보존가치에 비해 이를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보존할 대책은 아쉬운 상황이다.

고성1리의 경우만 해도 문 조합장과 일부 주민 외에는 목축 문화재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축산농가에 남아있는 전통 목축문화재도 앞으로 얼마나 유지될지 장담하기 어렵다.

제주 지역 전체를 둘러봐도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과 제주대박물관 등에 목축과 관련한 고문서와 의복, 농기구 등이 남아있긴 하지만 목축문화를 포괄적으로 알리고 보존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대로 가면 그나마 남아있는 문화재들도 현재 원형이 거의 사라진 '목자복'(테우리들이 입었던 털가죽옷)과 같은 전철을 밟을 수 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제주도민들이 마을공동목장에 만들어 놓은 시설도 마찬가지다.

당시 다양했던 목축시설중 급수장과 피서림, 방풍림, 경계 돌담 등은 남아있지만 테우리막이나 진드기 구제장 등은 대부분 현대식으로 새로 지어져 옛 형태를 찾아볼 수 없는 형편이다.

조선시대 1~10소장에 걸쳐 제주를 휘감은 잣성도 전혀 활용되지 못한 채 방치되며 소멸의 길을 겪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제주사회에서 목축의 주인공이었던 테우리 집단에 대한 저조한 관심과 무관하지 않다.

여기에 테우리들의 고령화로 700년 이상 이어졌던 전통적 목축의 기억도 사라질 위기다. 원형이 없다면 옛 테우리들의 기억에 의존해서라도 재현하는 작업이 시급하다.

예를 들어 테우리들이 머물던 전통적 테우리막의 경우, 박물관 등에 옛 방식대로 돌을 둘러쌓고 서까래와 띠를 얹어 재현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테우리들의 목축문화를 체험하고, 이들의 목축기술을 전수할 테우리박물관이 건립이 시급한 또 하나의 이유다. 김봉철 기자

 

좌동열 문화관광해설사

백중날이 되면 목장의 목감(소를 돌보는 사람) 막 옆 깨끗한 잔디밭에서 백중제를 지낸다.

제물로는 통닭, 돼지머리 웃착, 쌀바, 좁쌀밥, 생미나리겉절이, 감주를 올리고 향을 피운다.

축을 고하고 절을 하는데, 축문에는 소가 목장 돌담을 넘어 다른 곳으로 도망가지 않게 해달라고 빈다.

소는 워낙 똑똑하기 때문에 자신이 태어난 곳을 기억하고 있으며 기회가 되면 고향을 찾아간다. 이를 '지선'이라 말하는데, 애월 고성에서 구좌까지 고향을 찾아간 소를 본 경우도 있다.그래서 소가 정해진 구역을 벗어나면 멀리까지 가버리기 때문에 잃어버릴 수가 있다. 그래서 소유를 분명히 하기 위해 낙인을 찍는데, 고성 1리는 봄에 낙인을 찍었으며, 마을 낙인으로는 '고(古)'자 낙인이 있었고, 양칩에서는 '양(良)자 낙인을 사용했다.

소의 질병 치료에 특별한 방법은 없었다. 소가 병에 걸린 것 같으면 녹나무가지를 태워 연기를 맡게 한 후에 침주는 사람을 찾아가 침을 맞게 했다. 침의 크기는 전쟁용 무기인 창만큼이나 컸는데, 그 침으로 소의 어깨부분과 다리부분을 몇 군데를 찌르면 피가 '쿨락쿨락' 나오고 나서 소의 병이 나았다.

소에게 있어 가장 위험한 경우는, 소가 마른 콩을 많이 먹어 과식했을 때이다. 소가 마른 콩을 먹으면 주인은 긴장을 하게되고 걱정을 많이 한다.

이때는 초신(짚신)을 손에 쥐고 종일 소의 배를 힘주어 쓸어주면서 소화가 빨리 되도록 해 주었는데, 이렇게 하고난 후에 보면 소의 배 부분의 털이 모두 빠져있었다.

소의 보양식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콩이나 보리 졸랭이(깍쟁이)를 건초에 넣어 죽을 쑤어 먹였고, 부잣집 사람들은 닭을 돌혹(돌절구)에 넣고 빻아 거기에 콩이나 보리졸랭이를 넣고 죽을 쑤어 먹이기도 했다.

이런 영양식은 주로 소장사들이 소를 살찌게 해서 좋은 값을 받기 위해 먹이던 방법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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