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마을공동목장사 - 23.광령공동목장②

무수천서 물 문제 해결…치도 인근 백중제 진행
터만 남은 테우리막…5소장의 중심 보전 아쉬워
# 상산 올렸던 기억 현재도 생생
'상산'(上山)은 '마을 위의 산'이란 뜻으로, 주로 해발 1400m 이상의 한라산 백록담 남사면 고산 초원지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무더운 여름철, 목장내 피서림이 있는 경우 더위는 피할 수 있었지만 꾸준히 약을 발라줘도 극성을 부리는 진드기로 인해 우마가 쇠약해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때문에 도내 공동목장들에서는 기후가 서늘하고 진드기가 거의 없는 상산으로 소를 올리는 풍습이 일반적으로 행해졌다.
특히 상산은 물과 풀이 좋아 광령리에서는 '상산 올리고 나면 자기 소인지도 몰라본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살 찌우는데 효과가 좋았고, 그만큼 유행이었다.
광령공동목장 테우리들은 마을에서 촐왓인 오목이도 인근 하잣을 지나 한라산 사제비동산부터 만세동산 사이 돌담이 있는 구간까지 소를 올렸다. 기간은 양력 6~7월께다.
현재 상산 올리는 이뤄지지 않지만 이와 관련한 풍습은 이들의 기억속에 남아있다.
먼저 쇠를 올릴 때는 곤밥과 생선 등을 올리며 고사를 지냈고, 쉼터로는 곳곳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궤'(바위동굴)를 이용했다.
특히 윗세오름 일대는 광령리 주민들뿐만 아니라 제주시 해안동, 서귀포시 하원동, 도순동, 영남동, 서홍동 등 산남북의 우마들이 몰리는 장소로, 소를 잃어버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광령리의 소가 산남까지 가버리는 경우도 있었고, 반대로 하원동 소가 넘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보통 소를 잃어버렸다가 다른 마을 사람이 낙인을 보고 되찾아준 경우 맡아 돌봐준 동안 촐값을 주고 데려가기도 했다고 한다. 광령리에서 낙인자로는 '육(六)' '을(乙)' '토(土)' '광(光)' 등을 이용했다.
소를 못찾을 때는 오름 등 높은 동산에 올라가서 고사를 지냈다. 곤밥에 머리 있는 생선을 구워서 올리고, 절을 했다.
당시는 나무가 없어 높은 곳에 가면 사방이 훤히 보였기 때문에 고사를 치르는 것은 실제로 소를 찾는 데도 도움이 됐다. 오랜 기간 소를 찾지 못하면 점을 치기도 했는데, 적중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 테우리막·잣성 소실 진행중

일제강점기 무수천 상류에 만들어진 수도시설인 '치도' 물을 이용해 일단 사람들이 먹고, 일부는 이시돌 목장까지 공급했다. '치도'물은 용천수지만 기계로 퍼올려 수량을 늘렸으며, 감독관도 마을에 두었다. 치도에서는 예전에 자연적으로 물이 솟아났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천아오름의 동쪽, 치도 인근에서는 중요 의식인 백중제도 치러졌다. 치도는 현재 목장에서 한라산 방면으로 보이는 어승생저수지 위쪽에 위치해 있다. 소들은 목장내 연못 물을 먹었다. 현재는 일부는 메워진 상태다.
여느 목장과 다름없이 '밧갈쇠'는 경운기가 등장하기 전 최고 재산이었다. 집집마다 필수였으며, 곰돌과 나무, 섬피를 끄는 훈련을 시켰다.
이정웅 노인회장(74)에 따르면 당시 소 한마리 팔면 밭 하나에 송아지 한마리를 얻을 정도였다고 한다. 마을에 쇠·몰장시들도 있었으며, 육쇠는 제주항과 목포항을 거쳐 서울 천호동 도축장까지 가서 팔렸다.
이처럼 광령목장에는 목축과 관련한 풍부한 유산과 기억이 남아있지만 목축이 사양길로 접어들며 일부는 사라져가고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목장 중심에 테우리들이 머물렀던 '테우리막' 터가 있지만 벽을 쌓았던 돌들의 흔적만 남았고, 현재는 그 위로 널판을 설치해 쉼터로만 이용되고 있다.
옛 목장입구에 해당하는 잣성도 위기다. 특히 조선시대 5소장이었던 광령리 지역은 3소장과 함께 「제주읍지(濟州邑誌)」 등의 문헌에도 잣성 축조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어 보전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강만익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하잣성은 세종대인 1400년대 초부터 먼저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상잣성은 조선후기인 178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등장했다.
이를 통해 1700년대 중반까지 제주도 국마장에는 해안지역과 중산간 지대 경계부근에 하잣성이 축성돼 그 기능이 유지되다가 1700년대 후반에 들어 상잣성이 등장함으로써 하잣성과 상잣성이 목장 상하 한계선으로 이용됐다고 생각된다.
특히 상잣성은 3소장과 5소장에서 먼저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이후 상잣성 축성범위가 점차 확대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향후 문화재 보전이 추진될 경우 문헌 기록 여부가 중요 평가기준이 되는 만큼 목축문화 보전 차원에서 관심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김봉철 기자 ▲자문단=강만익 문학박사(한국사)·문화재전문위원, 좌동열 문화관광해설사.

광령목장은 조선시대 10소장 중 5소장에 해당한다. 특히 이 지역은 잣성의 설치기록이 남아있어 주목된다.
1780년부터 1789까지 편찬된 「제주읍지(濟州邑誌)」를 살펴보면 십소장 중 제주목 관할이었던 1소장, 2소장, 3소장, 5소장이라는 목장명칭과 상잣성 및 그 잣성 길이가 구체적으로 등장한다.
'3소장(三所場)에는 본래 횡장(橫墻)이 없어서 곧바로 한라산의 정상에 통하였으므로 말이 많이 분실되자 지난 경자년 봄에 목사 김영수가 비로소 1110보의 횡장을 쌓아 그 폐단을 막았다' '오소장(五所場)에는 본래 횡장이 없어서 곧바로 한라산의 정상에 통하였으므로 말이 많이 분실되자 지난 경자년 봄에 목사 김영수가 비로소 1530보의 횡장을 쌓아 그 폐단을 막았다"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는 우선 간장(間場)이라는 잣성이 주목된다. 3소장과 5소장이 한라산 정상과 통해 말들이 한라산 밀림지대로 들어가 잃어버리는 문제가 발생하자 이를 예방하기 위해 횡장이 축조되었음을 기록으로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다.
이 횡장은 상잣성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이는 상잣성, 나아가 제주도 잣성에 대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상잣이라는 명칭이 등장하지 않을 뿐이다. 이를 통해 1780년경에도 상잣성이 비록 일부이지만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축조된 상잣성 길이는 3소장의 경우 1110보, 5소장의 경우 1530보이다.
특히 제주도문화재위원회 의견을 바탕으로 잣성 도지정 문화재 지정 추진이 검토되고 있는 시점에서 조선시대 잣성의 정확한 설치 기록이 남아 있다는 점은 참고할 만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