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인문학 詩네마 토크 (1) 시가 내게로 온 영화

짐 자무쉬 감독의 영화 '패터슨'.

반복·비유 이미지 변주 등 시의 수사학적 원리와 유사
어떤 강렬함, 몸에 새겨지는 언어 될 수 있음을 표현

나에게 좋은 영화란 시적인 영화다. 시적인 영화가 무엇이냐 물으면 시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기 어려운 것처럼 단적으로 말하기 곤란하다. 시언어는 이미지의 언어, 사유의 언어다. 하나의 행에도 공감각적 이미지가 숨어 있고, 하나의 시어에도 중첩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언어로 보이지 않는 것을 사유케한다. 별것 아닌 것을 별스럽게 만든다. 즉, 가장 경제적인 언어로 가장 많은 말을 하는 것이 시언어이다. 

시를 닮은 영화를 보면 여운이 오래 남는다.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어 일기를 쓰고 싶어진다. 영화 <패터슨>(2016)을 볼 때가 그랬다. <패터슨>은 시를 닮은 영화일 뿐만 아니라시 그리고 시인에 대해 말해주는 영화이다. 영화의 구성은 시를 닮았다. 반복과 비유, 이미지의 변주, 이미지에 겹쳐 흐르는 음악, 중첩의 의미 등이 시의 수사학적 원리와 너무나 유사하다. 무엇보다 주인공의 표정 연기가 뭐라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시 그자체다. 그러니 <패터슨>은 완벽한 詩네마이다. 

짐 자무쉬 감독의 영화 <패터슨>은 저지 주의 소도시 '패터슨'에 사는 버스 운전사 패터슨(아담 드라이버 역)의 이야기이다. '패터슨'은 이 영화에서 삼중의 의미가 있다. 주인공 이름인 동시에 그가 사는 도시 이름이며 주인공 패터슨이 좋아하는 시인 위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집 제목인 것이다. 

영화에서 주인공 패터슨은 매일 규칙적인 일상을 보낸다. 매일 6시 10분에서 6시 30분 사이에 눈을 뜨고, 아침을 먹고 버스 회사로 출근한다. 그리고 틈틈이 시를 쓰고,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한다. 산책길에 동네 카페에 들러 맥주 한잔을 마시고 돌아온다. 그의 아내 로라(골쉬프테 파라하니 역)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컵케이크를 만드는 재빵사이다. 그리고 색채 디자이너이다. 사방에 흰색, 검은색으로 특정 패턴의 문양을 그려넣는다. 샤워커튼, 앞치마, 심지어 차바퀴까지. 

이들 부부의 일상은 사실 매일 반복되는 것 같지만 어느 하루도 똑같은 날이 없다. 같은 침대에서 자나 서로 누운 모양이나 자세가 다르고, 눈이 뜨이는 시간이 다르고, 서로를 쓰다듬는 몸짓이 다르다. 로라가 굽는 컵케이크이나 커텐, 식탁보, 기타의 무늬는 똑같은 것 같으나 자세히 보면 다 다르다. 심지어 그들과 사는 개 마빈의 표정은 얼마나 다채로운지. 마빈은 매일 주인이 시키는대로 하는 것 같으나 감정을 몸짓이나 표정으로 표현할 줄 알며 산책길에도 자신의 의지에 따라 방향을 고집한다. 급기야 패터슨과 로라가 심야영화를 보러 나간 날은 패터슨의 비밀노트(시가 적혀 있는)를 찢어버리는 사건을 저지르기도 한다. 

어쨌든 이 영화의 주된 기법은 반복인 것 같으나 실상 똑같은 장면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무수한 쌍둥이들(쌍둥이 꿈, 쌍둥이 소녀, 쌍둥이 할머니 등)을 출현시켜 헛갈리게 한다. 그것은 일종의 전략이다. 반복을 강조하면서도 하나도 같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캐릭터에서도 나타난다. 주인공 부부의 직업은 시를 쓰는 버스운전사이면서 기타를 치는 재빵사인 것이다. 딱히 뭐라 규정할 수 없는 매일매일을 새롭게 창조해내는 삶의 예술가들인 것이다.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보는 팁이 있다면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 캐릭터와 미장센, 이미지에 흐르는 시에 집중하는 것이다. 패터슨은 휴대폰을 갖고 다니지 않는다. 대신에 도시락통은 매일 들고 다닌다. 도시락통에는 단테의 사진과 장미꽃, 아내 로라의 사진과 그녀가 만들어준 머핀빵 등이 들어 있다. 그것들은 패터슨의 시적 영감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패터슨은 버스에 탄 승객들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듣는다. 버스에 탄 승객들의 이야기는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무정부주의자의 이야기까지 다채롭다. 이야기를 엿듣는 표정에서도 알 수 있듯 그의 표정에서 감정을 읽어내는 건 쉽지 않다. 감정이 없다기 보다는 하나의 단어로 수렴되지 않는 표정을 짓기 때문이다. 개 마빈이 비밀노트를 찢어버렸을 때도 침대 끄트머리에 잠시 손깍지를 하고 앉아 있을 뿐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는 등의 표현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덤덤하거나 냉정하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처럼 보이는 날도 있다. 

버스가 전기장치 문제로 고장나서 승객들을 대피시키고 난리가 났던 날도 충분히 피곤했을텐데 길을 가다 만난 노숙자에게 돈을 주고가는 여유를 부리고, 집으로 들어가다가 마빈이 건드리는 바람에 귀우뚱해진 우체통을 한참 바라본다. (전날에는 기우뚱해진 우체통을 세우고 들어갔다) 이처럼 감정에 따른 행동은 예측 불가능하며 지극히 지극히 내적 흐름에 충실하고 있다. 매일 드나드는 술집에서 에버렛이라는 인물이 자살소동을 벌일 때는 용감하게 저지하는 기염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절대 웃을 것 같지 않은 얼굴에서 껄껄 웃음이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이처럼 패터슨이라는 인물은 골몰함, 진지함, 순진함,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 등을 지닌 시인인 것이다. 

영화가 시적일 수 있는 건 미장센이 언어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며 패터슨이 드나드는 술집 벽에 붙여져 있는 사진들은 미국 뉴저지주가 배출한 걸출한 인물들 사진이다. 이는 패터슨이 시를 쓰는데 영향을 준 뉴저지 출신의 시인들을 은유함과 동시에 그의 열망을 배신하는 이미지들이다. 패터슨의 책상에는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 사진이 붙여져 있다. 또한 영화 속에서 나열되는 에밀리 디킨슨, 앨런 긴즈버그 등은 패터슨의 시적 열망, 추구하는 시세계를 짐작케하는 시인들이다. 

한 줄/오래된 노래가 있다/할아버지가 즐겨 부른 노래/거기 이렇게 묻는 게 있다/차라리 물고기가 될래?/같은 노래 속에/노새와 돼지로 바꿔서/물어보는 것도 있다/하지만내 머릿 속에서/가끔 들리는 건/물고기에 관한 것 뿐/바로 그 한 줄/차라리 물고기가 될래?/마치 노래이 나머지는/거기 없는 것 같다. (영화 <패터슨>에 인용된 시)

영화 <패터슨>의 엔딩 장면에 인용된 시이다. 영화는 시의 특성에 대해 함축하는 시로 마무리하고 있다. 한줄의 시가 어떤 강렬함, 몸에 새겨지는 언어가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 패터슨이 버스를 운전하면서 들려오는 이야기, 스치거나 물끄러미 쳐다본 우연의 장면에서 튀어나온 어떤 영감이 상상력과 만나 육화된 언어로 흘러나오는 것이 그의 시이다. 

삶이 무수한 반복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무수한 차이에 의한 새로운 가능성일 수 있지 않을까. 영화 말미에 나오는 오사카 시인이 말처럼 "빈노트가 많은 가능성을" 주듯이 모자람 속에 아낌없는 사랑이 피어나는 것이 아닐까… 등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 <패터슨>은 시를 닮은, 시에 대한, 시인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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