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식간에 몰아치는 폭우로 꼼짝없이 갇혀 있다가 잠잠해질 때를 기다려 길을 나선다. 언제 그랬냐는 듯 길은 고즈넉하고 차분하다. 사람도 격정적인 감정을 폭발하고서야 겨우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할 말 못 할 말 다 쏟아내고 나서야 기운이 스르르 빠지면서 안정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내가 왜 이런가' 싶을 때쯤이면 제 마음의 본색을 알 수 있다. '많이 아팠구나' 싶어 자기연민에 빠지기도 하지만 방패막이 역할을 해준 상대방에게 미안해지기도 한다. 그때의 낯빛은 대체로 소금기를 머금은 선홍빛이다. 

자물쇠가 채워진 나무.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땅 한 번 쳐다보면서 길을 걷는데, 나무에 자물쇠가 채워진 것을 발견하고 멈칫 한다. 나무에 자물쇠라, 무슨 의미일까? 나무에 번호가 매겨진 것은 본 적 있으나 자물쇠가 채워진 것을 본 건 처음이다. 혹시 이름이 새겨졌을까 더듬거려 보았으나 별다른 흔적은 없다. 아마도 자전거를 매다는 자물쇠가 아니었나 싶다. 그 주변 가게에서 오토바이를 채우느라 그런 장치를 했을 수도 있겠다. '개인 소유물도 아닌데, 그럴 리가?', 의아한 마음을 안고 다시 걸음을 뗀다. 

따지고 보면 세상 만물사가 다 무언가에 갇히고 갇히는 역사가 아닐까 싶다. 바다는 수평선에 갇히고, 하늘은 인간사에 갇히고, 인간은 자기욕망에 갇히고 산다. 아무리 선한 일을 한다고 해도 실상은 자기욕망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무(無)로서의 자유'를 외쳤나보다. 세상이라는 망망대해에 던져진 존재는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무화되었을 때 차 존재의미가 있는 것이다.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고, 안일한 행복에 빠지고, 선한 의지에 의한 행동도 따지고 보면 자기기만인 것을 무엇을 그렇게 잘난 척을 하게 되는 것인지. 

하늘이 나를 보고, 마음이 나를 보고, 요즘은 인공위성이 나를 보고 있단다.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이 제안한 패놉티콘(panopticon, 원형감옥)은 이제 보이지 않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굳이 인공위성이 나를 보지 않아도 지금의 나의 모든 정보는 스마트폰을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 되고 있는 셈이라니 온몸에 살얼음이 돋는다. 다큐멘터리 영화 <위 약관에 동의하십니까?>는 우리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감독에 갇혀있는가를 보여준다. 

다큐멘터리 <위 약관에 동의하십니까>는 저명한 미디어 학자들을 총동원해 온라인을 통한 개인정보 유출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준다. "동의합니다(I accep)"라는 문구에 클릭과 동시에 나의 사생활은 수집되고 데이터 베이스화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수집된 정보는 법적 책임을 묻는 일에 근거가 되며, 개인의 인격을 판단하는 근거로 활용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취직 시 면접관은 이미 내 개인정보를 다 알면서 질문을 한다는 것이다. "평소에 무엇에 관심이 있나요?"라는 질문은 " 왜 그리 옷 사는 것에만 관심 있나요?"일 수 있다는 이 서늘한 일침! 쇼핑몰에서 아주 소소한 것을 구매하려 해도 개인정보 동의가 필요한데 하루에 얼마나 많은 경로를 통해 내 정보가 유출되고 있는지 상상이나 되겠는가. 볼펜 한 자루 산다고 개인정보 유출에 동의하라니 이게 말이 되는가? 

인간의 상상력은 헤리포터의 마법에 열광하게 하고, 한시라도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도 하고 있다. 인간의 상상력은 꿈을 꾸게도, 꿈을 망각하게도 하는 것이다. 스마트폰 세상 속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유영하다보면 현실을 어느새 망각하게 된다. 현실에 발을 내리지 못한 삶은 자동인형이 되어 꿈꾸듯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되는 인지능력의 마비에 걸리고 마는 것이다. 

까뮈의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살인죄로 감옥살이를 하다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가 잃어버린 것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이며, 그를 둘러싼 세계가 그를 정신없이 살도록 감금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외친다. 나에게 기도를 강요하지 말라고. 그렇게 분노를 터뜨리지 몸의 감각이 열리면서 새로운 감정, 생각들이 밀려온다. 그에게는 변론할 자유도 있지만 변론하지 않을 자유도 있다. 뫼르소는 변론하지 않을 자유를 선택한다. 죽음을 택함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전원(田園)의 소리들이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밤과 대지와 소금의 냄새가 관자놀이를 시원하게 해 주었다. 잠든 여름의 그 멋진 평화가 조수처럼 내 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때 밤의 끝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내게는 영원히 관계없는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는 것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처음으로 나는 어머니를 생각하였다. 만년에 왜 어머니가 '약혼자'를 가졌었는지, 왜 생애를 다시 꾸며보는 놀음을 했었는지 나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곳, 생명이 하나둘 꺼져가는 양로원에서도 저녁은 서글픈 휴식시간이었을 것이다. (……)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괴로움을 씻어주고, 희망을 없애준 것처럼 이 징후와 별들이 가득 찬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다정스러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었다. 그처럼 세계가 나와 비슷하고 형제 같음을 느끼며, 나는 행복했다. 모든 것이 이룩되고, 내가 외롭지 않다는 것을 느끼기 위하여 다만 나에게 남은 소원은,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수많은 구경꾼들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까뮈, 『이방인』 중에서)

우리에게 강요된 감금의 생활,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을 자유는 우리에게 있다는 것, 뫼르소의 죽음은 그것을 가르쳐준다. 오늘 나는 왜 길을 나서며, 왜 책을 보며, 왜 시장을 보는가 생각해볼 일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라는 말은 자기기만의 대명사는 아닌지 더욱 따져볼 일이다. 죽음 속으로 기쁘게 뛰어 들어간 뫼르소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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