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산과 들 어디를 가든 만나게 되는 풍경 가운데 하나는 무덤이다. 어쩌다 벌초가 되지 않은 무덤을 만나면 내가 그 안에 있는 자의 자손인 것 마냥 미안하고 부끄럽다. 무덤을 둘러 싼 산담을 보면 후손들의 흥망성쇠를 보는 듯 씁쓸하다. 누군가 내 아버지의 무덤을 지날 때고 이런 생각을 하겠구나 싶어 마음이 무거워진다. 

봉토 하나로 겨우 버티고 있는 내 아버지의 집. 어머니는 봉분 위의 잔디가 다 벗겨지고 있다고 한숨을 쉬었다. 태풍이나 비가 많이 오는 날씨엔 한숨이 더욱 깊어질 것이다. 산 사람들의 자리도걱정일 텐데 죽은 사람의 자리까지 걱정을 보태니 한숨이 뚫고 간 구멍이 봉분만하다. 

오름 입구에 작은 봉분 하나가 있다. 햇빛과 바람에 젖은 머리를 말리고 있나보다. 봉분 위 잔디가 듬성듬성하다. 봉분이 작은 걸 보니 어느 집 어린 자식의 무덤인 것 같다. 얼마 전 '마음의 글쓰기' 모임에서 만난 어느 여성분의 말이 생각난다.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어요. 눈이 정말....우리오빠지만 송중기보다 더 잘 생겼어요."라고 말하면서 입가에는 웃음이 번지는데,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난 오빠가 정말 우리 오빤줄 알았는데...알고 보니 아버지가 ...그러니까 나는.... ," 의외의 말에 나는 움칫거렸다. "그래도 우리는 친하게 지냈죠. 그런데 오빠 나이 열 셋에 죽고 말았어요. 물에 빠져서." 그 일로 아버지가 술병을 달고 살다가 쉰도 안된 나이에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아버지의 죽음은 자신의 출생이 만천하에 밝혀지는 계기가 되었기도 하고.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디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백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닥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 이어니, 고흔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러 갔구나! -정지용, 「유리창1」전문

오빠를 잃은 여동생의 마음도 알 것 같고,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도 알 것 같다. 그런데 더 슬픈 건 유일하게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혼자가 돼버린 나이 어린 딸이다. 그러니까 그 둘은 어머니가 다른 이복남매였던 것이다.

잘생긴 오빠를 두어서 자랑스러워하던 여동생은 자신들의 관계가 이복남매라는 것을 알고 난 후 한동안 실의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다르다는 것이 그렇게 이상하면서도 부끄러웠다고. 그런데 부끄러워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아버지가 바람피웠다는 것? 그렇다면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그분의 아버지 아닌가?

'마음 글쓰기'에 참여한 그 분이 호소하는 문제는 아직도 자신의 출생에 대해 남편에게 고백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말을 못하겠다고. 그렇게 마음에 꽁꽁 숨겨놓고 살다보니 가끔은 외로움이 견딜 수 없이 밀려온다고. 도대체 그녀가 부끄러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남편에게 말했다고 해서 남편이 어떻게라도 할까봐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녀를 괴롭히는 건 어려서부터 의식한 타인의 시선이 내면화된 것이다. 타인들이 자신을 부정에 의해 탄생한 아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영화 <비밀과 거짓말>의 한 장면.

영화 '비밀과 거짓말'은 양어머니와 살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생모를 찾아 나선 흑인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주인공 호텐스는 양어머니의 장례식 이후, 허전한 마음이 들면서 자신의 생모를 찾고 싶어한다. 자신의 입양기록을 보게 된 호텐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의 어머니는 흑인이 아니라 백인인 것이다. 호텐스는 용기를 내어 생모 신시아에게 전화를 건다.

공장노동자로 딸 록산과 힘들게 살아가고 있던 신시아는 호텐스의 전화를 받고충격과 미안함, 설레임 속에 상봉하게 된다. 청소노동을 하며 말썽을 부리기만 하던 딸 록산을 대하다 지적인 여성 호텐스를 만난 신시아는 자신의 비밀을 뒤로한 채 새로운 삶의 의미와 즐거움을 찾게 된다. 한마디로 살맛나는 나날이 된 것이다. 물론 록산의 충격은 말할 것 없이 컸지만 어머니의 진실 앞에 과거의 비밀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비밀이란 것이 그렇게 대단할 것도 없다. 인생사에서 실수 또는 실패담은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결혼 또는 가족의 구성과 관련한 비밀이라 할지라도 한 인간으로서 바라본다면 존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막말로 어머니가 딴 데 애가 있다 하더라도 그건 어머니의 삶이라고 봐줄 수 있는 포용력과 존중감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아직 우리의 가족 개념 안에는 다분히 소유 개념이 강하다.

나의 어머니, 나의 딸, 나의 아들... 등 관계에 대한 책임성과 영원성의 무게만큼이나 강력한 소유 및 지배관념을 함의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가족이라 할지라도 한 개인으로서 삶이 있다는 것, 그것이 혹시 비밀에 붙여진 것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말하지 않는 한 물을 권리는 없다는 것, 그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성숙한 가족동반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지 못한 이유 때문에 아직도 가족에게마저도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벙어리 냉가슴이 많긴 많다. 가족도 부모이고, 아내이고, 딸이고, 아들이기 이전에 사람이다. 강은미 문학박사·제주대 스토리텔링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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