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보면 유독 빈집들에 눈이 머물게 된다. 저 집엔 누가 살았을까. 그 집에 살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누가 저 집에 살게 될까 등. 누군가에게 이 말을 했더니 자신은 집값이 얼마일까가 더 궁금하다고 해서 한바탕 웃었다. 어쩌면 그게 더 솔직한 말일 수 있겠다. 

오랜만에 나의 청소년기를 보낸 신촌길을 걸었다. 혼자서가 아니라 여럿이 걸었다. 마을은 조용한데 손님들이 왁자지껄 시끄럽게 구는 바람에 집 안에 든 사람들이 가끔 내다보기도 했다. 뭘 하러 돌아다니냐는 물음이 있어 마을길은 걷고 있다고 하니 의아한 표정이다. '마을길을 걸어서 뭐해? 뭐 볼 게 있다고' 라는 표정이랄까.  그들의 의심쩍은 표정은 당연하다. 우리가 사는 곳에 대해 의미부여를 하는 일은 거의 없으니 말이다. 

노인회관 옆 쉼팡에 지팡이를 짚은 노인 한 분이 앉아 있다. "뭐하세요"라고 물었더니 아무 말이 없다.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라고 물었더니, "쉰아홉"이란다. 보아하니 여든은 넘은 듯한데 '쉰아홉'이라 하는 걸보니 기억이 쉰아홉에서 멈췄나보다. 아니면 쉰아홉에 충격적인 일을 겪었던지. 나의 할머니도 아들의 죽음을 겪으니 기억이 거기서 뚝 그치고 말았다. 정정하던 분이 충격적인 일을 경험하고 나니 갑자기 치매가 들면서 기억도, 감정도, 의욕도 사라지고 말았다.

"누구 기다리세요" "몰라" "식사 하셨어요" "어서"...맥락 없는 말들 속에 잊고 싶은 사연들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슬퍼졌다. 할머니 손을 두어 번 어루만지다 인사를 하고 다시 길을 걷는다. 

흙더버기 빗길 더나간 당신의 자리 같았습니다 둘 데  없는 내 마음이 헌 신발들처럼 
남아 바람도 들이고 비도 맞았습니다 다시 지필 수 없을까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으면 
방고래 무너져 내려 피지 못하는 불씨들
종이로 바른 창 위로 바람이 손가락을 세워 구멍을 냅니다 우리가 한때 부리로 지푸라기를 
물어다 지은 그 기억의 집 장대바람에 허물어집니다 하지만 오랜 후에 당신이 돌아와서
나란히 앉아 있는 장독들을 보신다면, 그 안에 고여 곰팡이 슨 내 기다림을 보신다면
그래, 그래 닳고 닳은 싸리비를 들고 험한 마당 후련하게 쓸어줄 일입니다 (문태준, 「빈집1」)

빈집이다. 대문 옆 담벼락에 주택매매 팻말이 붙여져 있다. 담쟁이들은 집을 감싸며 지붕 위로 올라가고 있다. 사람은 없지만 온갖 생명들이 제 사랑의 역사를 쓰고 있다. 마당에 풀들이 문을 열고 들어갈 듯하다. 방 안 가득 풀들이 누워있는 풍경을 상상해본다. 그러면 노루며 두더지 다람쥐, 산토끼들도 찾아올 듯하다. 그러면 책읽기 좋아하는 할머니가 동물들에게 책을 읽어주겠지. '책 읽기 좋아하는 할머니' 생각이 난다.

「책 읽기 좋아하는 할머니」는 소란스럽고 분주하고 복잡한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시골로 빈집 하나 구해 들어간 할머니 이야기다. 숲 속 동물들이 추운 겨울날이 되자 할머니 집으로 모여든다. 할머니는 푹신한 의자에 앉아 동물들에게 책을 읽어준다. 아무리 동화지만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나게 한다. 

마을마다 제각각의 풍경과 색깔이 있지만 이번에는 나름의 테마를 안고 길을 걸었다. 내가 선택한 테마는 '집'이다. '이 마을에는 어떤 집들이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길을 걸으니 정말 각양색색의 집들이 눈에 띄었다. 기와집, 초가집, 슬레이트집, 빈집, 오래된 집. 철문이 있는 집, '개조심'이라 써진 대문이 있는 집, 우체통이 빨간 집, 개가 짖는 집, 사람이 있는 집, 사람이 없는 집, 잔디가 있는 집, 시멘트 바닥인 집, 집은 없고 터만 있는 집, 수도가 있는 집, 감나무가 있는 집, 배추를 기르고 있는 집, 깃발이 보이는 집, 문패가 걸린 집, 담장이 높은 집, 담장이 없는 집등 그런데 기이한 집 하나를 발견했다. 집안 가득 쓰레기로 채워진 집. 예술작품인가 싶어 이리저리 살펴봐도 그냥 쓰레기집인 게 분명하다. 

예전에는 동네 쌀가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사를 가면서 임시로 짐을 담아 논 것이라 볼 수도 있으나 짐이라 하기에는 너무 많은 쓰레기가 겹겹이 쌓여 있다. 쓰레기들이 문을 열고 길 밖으로 도망쳐 나오려는 기세다. 이 또한 무슨 사연이 있으려니 싶다. 하필이면 옛 향사를 옆에 두고 있어 집의 입장에서는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원래 집은 아무런 죄가 없으니 얼마나 억울할까. "뭐 내가 이러고 싶어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라며 항변할 듯하다. 주인이었던 사람의 운명에 따라 집도 길이 달라지는 것이다.

한 마을에서 이사를 예닐곱번 다녔다. 이참에 기억을 되살리며 찾아봤다. 내가 이사 다닌 곳만 찾아다녀도 웬만한 여행코스는 되겠다. 여긴가 저긴가 하면서도 옛집의 흔적들을 찾을 수 있었다. 주로 실마리가 되어준 것은 팽나무, 돌팡, 작은 골목 같은 것들이다. '여기서 몇 발짝이면, 여기로부터 오른쪽으로 돌면' 이런 식으로 기억을 더듬다보니 옛집 터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집은 없고 그 터만, 또는 또 다른 집이 들어섰다 하더라도 얼마나 반가웠던지. 이런 감정을 느끼려 사람들은 고향을 찾는 것일까. 고국을 떠난 사람들이 우리말 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눈물이 난다고 하던데, 이제 이해가 간다.

저 쓰레기집 주인도 언젠가는 이 마음이겠구나 싶으니 안심이 된다. 저 쓰레기더미처럼 복잡한 사연이 있다면 조금씩 조금씩 등짐으로라도 쓰레기를 나눠서 버렸으면 한다. 어머니는 가난한 시절, 하도 등짐으로 이사를 다니다보니 귀찮아서 웬만한 건 다 버리게 됐다고 하신다. 쓰레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때문에 어렸을 적 내 사진첩도, 일기장도 남아 있는 게 없다. 우리 가족의 20년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어머니는 마지막 남은 한 장, 처녀 적 사진을 여러 겹 손수건에 싸서 고이 보관하고 있다. 나도 덕분에 기억하려드는 습관이 생겼다. 그래서 더욱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잊지 않기 위해서. 이렇게라도 내 몸에 새겨두려는 지독한 애정결핍, 이것이 내가 걷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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