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화가(1490?~1576) 티치아노의 회화 '인간의 세 시기'는 '세월의 흘러감'에 대한 사유와 인간의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 유아기, 청년기, 노년기의 세 시기를 위치와 크기, 구도를 달리 함으로써 인간 발달단계의 중요성과 그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오른쪽 맨 앞에 위치한 청년기의 모습에서 가장 건강한 육체와 서로에게 향한 강렬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그보다 조금 거리를 두고 왼쪽에 위치한 그림에서는 몽실몽실한 유아들의 불균형적인 몸과 한사코 누군가에 의지하려고만 하는 강한 의지에서 귀여움과 더불어 강한 생명력을 느낀다. 그리고 그 너머 나무 아래의 노인의 모습은 애처롭기 그지없다. 마치 도래할 자신의 죽음을 껴안고 있는 듯 안쓰럽게 해골을 내려다보고 있다.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한 노인의 심경은 어떠할까. 홀가분하게 다 내려놓고 떠날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 들 수도 있으나 좀 더 살아보고자 하는 욕망에 가슴이 저리겠구나 싶기도 하다. 

할머니는 94세에 돌아가셨다. 평소에 소식을 하고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하셨던 분이다. 좀 더 사실까 싶었는데 아들을 먼저 보내고 마음이 급작스레 유약해지시더니 치매를 앓기 시작하고선 얼마 안 돼 돌아가셨다. 남들은 "그만하면 사실만큼 사셨다", "호상(好喪)이다"라고 했으나 나는 못내 아쉽고 가슴 아팠다. 

1910 경술년생의 할머니, 할머니의 인생 전체는 한국근현대사와 맥을 같이 한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해에 태어나서 열아홉에 결혼, 줄줄이 낳은 아이들을 모두 잃고 배 속에 아이 하나가 있을 때 남편을 잃었다. 그때 할머니 나이 서른셋.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내 아버지다. 평생 그 아들 하나만 믿고 사셨다 해도 과언이 아니나 아들은 어머니의 속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눈만 뜨면 원망하는 말만 해댔다. "왜 난 아버지가 없냐"고. "난들 니 애비가 왜 죽었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항변해본들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는 없었다. 

어려서 내가 기억하는 건 아버지의 술주정에 늘 빠지지 않던 말 "난 아버지 얼굴도 모른다"였다. 그 소리는 정말 듣기 싫었다. 반복되는 술주정을 당해내는 자는 드문 법. 나는 아버지의 반복되는 말이 술주정이라고만 여겼지 아버지 없는 설움을 토해내는 어린아이의 울음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살다 아버지는 쉰 넷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를 떠올리면 어린아이를 가슴에 안은 퀭한 눈빛의 사내가 떠오른다.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유년기, 청년기, 노년기 등 직선적인 인생의 세 시기가 아니라 각 시기를 첩첩이 껴안고 있는 인생의 새로운 시기를 그려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오랜만에 귤밭을 보러 갔다. 몇 올 남지 않은 민머리 사내처럼 귤 밭에 귤나무는 몇 그루 있지 않다. 서너 해 관리 하지 못한 밭을 얼마 전 남의 손을 빌려 정리했는데, 아직 따지 못한 귤이 귤나무 하나에 고스란히 달려 있다. 까치들도 이젠 귤 맛에 질렸는지 잘 드나들지도 않나보다. 휑하니 너른 밭에 두 그루의 귤나무가 대비돼 뒷걸음치는 나의 발걸음을 부여잡는다.

마른 잎일지언정 아직 열매를 달고 있는 나무와 나뭇가지, 잎사귀 다 떨어지고 톡 건드리면 부러질 듯한 나무가 나란히 서 있다. 같은 해에 같은 땅에 자란 두 나무의 일생은 이처럼 확연히 길을 달리하고 있다. 누군가는 이 정경을 보고 보기 흉하니 잘라버리고 땔감으로라도 쓰라고 말할 듯하다. 두 발을 나무의 밑둥치에 대었다가 도로 내려놓는다. 나무의 숙명이 다할 때까지 가만 내버려두는 게 상책일 거 같아서이다. 사실, 상책이랄 것 까지는 없다. 다만, 나무의 한살이를 지켜보고 싶은 욕망이 있을 뿐이다. 

한 때 이 귤 밭에도 많은 귤나무들이 서로 이웃하며 살았다. 봄이면 귤꽃이 피고 귤꽃향이 먼 길까지 퍼지면 지나가던 나그네도 귤꽃 향을 따라 이 곳에 머물렀을지 모른다. 봉긋봉긋 솟아오르는 열매들이 노란햇살을 머금을 즈음엔 터질 듯 싱싱한 젊음이 이 밭에도 가득해 주체할 수 없었으리라. 학교 길을 가던 아이들이 이 곳에 들러 흘낏흘낏 눈치를 보며 한두 알 귤을 훔치곤 가방 속으로 들이미는 즐거움도 있었으리라. 

게으른 주인 덕분에 이제 민머리가 돼 새들만 가득 불러들이며 겨우 버티고 있다니 밀려드는 죄책감에 긴 한숨이 나온다. 의지하던 귤나무들이 사라진 언덕바지에 쭈빗쭈빗 하늘로만 향한 삼나무들이 되레 송구한 모양이다. 하늘이 내린 햇살을 혼자 다 받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그들이 있어 몇 그루 남은 귤나무들이 한 식솔임이 분명해진다. 그들의 둘레가 귤 밭의 여백을 품어 안고 있는 것이다. 

언덕 위에 줄지어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나무 뒤에서 말없이나무들을 받아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다 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하나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넉넉한 허공 때문이다빽빽한 숲에서는 보이지 않는나뭇가지들끼리의 균형가장 자연스럽게 뻗어 있는 생명의 손가락을일일이 쓰다듬어주고 있는 빈 하늘 때문이다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모르는 사람은 <도종환의 시 「여백」 전문>

귤 밭의 여백에 풍경처럼 서 있다 돌아오며 '넉넉한 허공'에 대해 생각한다. 서로 이웃하는 이들이 있어야 안온하고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기 십상인데 허공이 오히려 행복할 수 있다니! 시인의 놀라운 통찰이다. 삼나무 가지들이 하늘을 향해 뻗은 모습에서 "생명의 손가락"을 본 시력 또한 존경스럽다. 하늘이 그 손가락을 쓰다듬으면 나무들은 온몸으로 간지러움을 탈 것이다. 바람이 나무의 몸을 끌어안고 까르륵까륵 웃음소리를 내는 걸 상상하니 절로 미소가 번진다. 오래 방치된 귤 밭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던 내가 넉넉한 허공을 선물한 자로 둔갑하면서 갑자기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허공은 내가 선물한 것이 아니라 귤나무들이 선택한 것인데 말이다. 온힘을 다해 버틸 만큼 버티다가 스스로 으스러지기를 선택한 이들. 여한 없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는지. 누군가의 돌봄 없이도 해마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달고 새들에게 양식을 제공하는 사랑을 많이도 베풀었다. 그러니 이제 남은 일은 허공을 좀 더 즐기다 스스로 흙이 되는 일이 아닐까. 돌아오면서 내내 나무의 생각을 더듬는다. 허공을 품은 나무가 되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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