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침략에 맞선 도민 주체적 대응…항일의식 고취 발판

고종황제 강제퇴위와 군대 해산 계기로 의병항쟁
일제 통신·재정·치안·재판권 장악에 맞서 거사결의
전남지역 의병과 교류 등 지역적 한계 극복 노력
계급적 이해관계 초월…도민 항일운동 동참 계기 

1919년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해 민족이 일어난 3·1운동이 올해로 100주년을 맞은 가운데 제주항일운동사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제주에서도 3·1운동을 전후로 일제의 탄압과 수탈에 맞선 항쟁과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된 것으로 전해진다. 제주의병 항쟁을 시작으로 법정사 항일운동, 조천만세운동, 해녀항일운동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제주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항쟁을 중심으로 제주항일운동의 배경과 추진과정, 의미 등을 4회에 걸쳐 살펴본다. 

△제주 항일독립운동 특징은

제주도가 지난 1996년 12월 발간한 「제주항일독립운동사」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 제주도는 전라남도에 소속돼 행정적으로는 하나의 군단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제주도의 항일독립운동은 다른 군에 비해 활발하게 진행됐다. 본토에서 진행된 항일독립운동에 동참하기도 했고, 독자적으로 항쟁을 진행하기도 했다.

한국항일독립운동의 일반적인 성격은 1919년 3·1운동 이후 계층별 계급의식의 각성과 사회주의사상의 침투에 따라 노동쟁의 또는 소작쟁의가 주를 이뤘다. 

그런데 제주에서는 계급적 갈등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반자본적, 반지주적 계급투쟁은 별로 없었던 것이 특징이다. 

항일운동의 계기는 대한제국 마지막 시기 국권회복운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본은 1904년 7월 군사경찰훈령을 만들어 치안권을 빼앗은데 이어 8월 한일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로 재정권을 빼앗아갔다. 이어 1905년 11월 을사조약을 체결해 외교권을 강탈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국권회복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대중적인 성격을 지닌 반일의병운동과 애국문화계몽운동이 전개됐다. 

△제주 의병항쟁 진행 과정은

한말 의병운동은 동기별로 구분할 수 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인에 의해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유인석·이인영 등 유림들이 양왜배척을 표방하며 거사했다. 

또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이재구 등이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는 거사를 단행했다. 

1907년에는 일제의 고종황제 강제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국권회복운동이 일어났다. 제주 의병항쟁도 이를 계기로 전개됐다. 

당시 일본은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제주목사가 재판소 판사를 겸하던 제도를 없애고, 제주구재판소에 일본인 판사를 발령했다. 또 제주우편국과 관재서를 설치하는 등 통신과 재정, 치안권과 재판권까지 장악했다. 

그러자 제주유생 고승천(개명전 고사훈), 이중심(개명전 이석공), 김석명(개명전 김석윤), 조인관, 노상옥 등이 의병 거사를 의논했다. 

1909년 2월 고승천, 이중심, 김석명, 노상옥, 김만석, 김재돌, 양남석, 한영근 등은 기병을 결의하고, 의병장에 고승천과 이중심을 추대했다. 

이들은 거사일을 3월 3일로 정해 격문과 통고문을 각 마을에 발송했고, 고승천은 병력 동원을 위해 대정군으로 출발했다. 

고승천, 조인관, 김만석, 김재돌, 양남석 등은 대정군 영락리에서 이장을 설득해 장정 20명을 가담시키고, 신평리와 안성리, 광청리 등지에서 장정 300여명을 모집했다. 

그런데 대정군수 김종하가 마을 장정을 동원해 의병들이 집결하고 있는 광청리를 기습하면서 의병들이 흩어지게 됐고, 민가에 머물고 있던 고승천과 김만석은 3월 1일 체포됐다. 고승천과 김만석은 항복을 권유받았으나 항쟁의 뜻을 굽히지 않아 총살을 당하게 됐다. 

이로 인해 3월 3일 거사는 물거품이 됐고, 격문과 통고문을 접한 이장들과 주민들도 거사 동참을 결의했다가 흩어졌다. 

△제주 의병항쟁의 의미는 

제주의병은 많은 주민들을 규합해 일본인을 처단함으로써 조선의 옛 법을 회복하고자 했지만 모병단계에서 진압됨에 따라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일제에 맞선 제주의병 항쟁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일제 침략에 대한 도민의 주체적 대응이었으며, 경제적 침략에 맞선 생존권 투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 당시 의병운동이 가장 거세게 전개되고 있던 전남 의병장들과의 교류를 통해 섬이라는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 

더구나 제주향촌사회에서 나름대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양반유생뿐만 아니라 하인들도 제주의병에 동참, 일본의 침략이라는 민족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계급적 이해관계를 초월하기도 했다. 

제주의병은 제주도민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실제로 의병항쟁 이후 많은 도민들이 적극적으로 항일운동에 동참하게 됐다. 김경필 기자

로 이뤄지고 있는지 검토가 요구되고 있다. 김경필 기자

장대현 제주도보훈청 보훈과장

"제주도는 도민과 함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공유하기 위해 다양한 행사를 추진하고 기념비적 시설을 설치할 계획이다"

장대현 제주도보훈청 보훈과장은 "2019년은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인 뜻깊은 해"라며 이같이 밝혔다. 

장 과장은 "오는 3·1절에는 만세대행진이 거행된다"며 "지금까지 조천읍에 국한된 행사를 넘어 제주 3대 항일운동인 법정사, 조천만세, 해녀항일운동 관련 단체 및 유족 등 2000여명이 참여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각 항일운동을 상징하는 의상을 입고 대행진이 진행된다"며 "특별히 올해는 조천만세운동을 주도했던 23인을 기억하기 위해 기념비를 제작, 제막식 및 기념수 식재 행사를 개최한다"고 강조했다. 

또 "독립의 횃불이 밝게 타오른다"며 "독립의 횃불은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출발해 임시정부수립일인 4월 11일까지 42일간 릴레이로 진행되는 전국적 행사로 1932년 호미와 빗창을 들었던 제주해녀들의 의기를 이어받은 후배 해녀들이 독립의 횃불을 든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장 과장은 "항일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겨 기억하고 보존하며, 그 가치를 계승하기 위해 애국지사의 구술자료, 항일관련 고문서, 사진 등이 포함된 제주항일독립운동사를 발간할 계획"이라며 "항일운동 사적지 안내판 시설도 설치할 예정"이라로 밝혔다. 

그러면서 해결 과제로 "제주항일독립운동사에 따르면 수백명에 이르는 항일독립운동가 등이 기록돼 있지만 현재까지 의병항쟁, 무오법정사 항쟁, 조천만세 및 해녀항일운동 등으로 수훈을 받은 포상자는 179명에 그치고 있다"며 "이에 대한 해결방안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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