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이제는 기록유산으로 3. 현대사 최초 기록유산 등재 5·18
5·18민주화운동 다수 인명피해…기록물 방대 2011년 등재
아시아 곳곳 민주화 역할 기여…상시 전시·특별전 등 노력
반면 제주만의 역사 남을 우려 제기…"공감대 형성 요구"
5·18민주화운동 기록물은 우리나라가 보유한 세계기록유산 중 현대사 자료로는 최초로 등재됐다. 특히 5·18민주화운동이 동아시아 국가들의 민주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면서 그 의미가 크다. 국가 폭력에 대한 숭고한 저항을 기록으로의 역사로 후대에 남기는 작업이 계속되는 가운데 제주4·3의 과제도 산적하다.
△승자·패자 없는 비극
1980년 당시 한국 현대사 중 가장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다. 신군부의 12·12 쿠데타는 결국 1980년 5월 광주 시민의 고귀한 생명을 앗아갔고 계엄군의 도청 진압 작전으로 5·18민주화운동은 외형상 그 막을 내리게 됐다.
5·18민주화운동은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 선포가 전국으로 확대된 이후 광주에서는 이에 저항하는 시위가 계속되자 5월 18일 광주 시내 대학에 계엄군이 주둔하면서 발발했다.
이후 열흘간의 항쟁 속에 당시 사망자 165명, 행불자 81명, 부상자(상 이후 사망 포함)·연행구금자 등 총 5568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됐다.
특히 5·18민주화운동은 현재까지도 진상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 조치 이후 광주에 공수부대를 증파한 이유,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를 진두지휘한 자, 광주 시민에게 발포 명령을 내린 자, 당시 미국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등이 아직도 미궁인 상황이다.
반면 5·18민주화운동으로 인해 여러 성과는 있었다. 우선 5·18민주화운동은 우리 역사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민중항쟁의 전통을 계승·발전시킨 계기가 됐다.
게다가 민중이 역사의 전면에 역동적으로 등장함으로써 민중이 민족사의 동력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켰다는 의의 등을 갖고 있다.
△현대사 최초 기록유산 등재
5·18민주화운동 기록물은 2011년 국내 현대사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의미가 크다. 기록물은 크게 항쟁 당시에 발생한 원천문서와 항쟁 이후 생산된 사후 문서를 포괄하고 있다.
원천문서의 경우 항쟁의 발발, 전개, 진압, 사상자 진료, 사망자 처리 등을 담은 공공문서와 군 자료 등이다. 사후 문서는 항쟁 후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전 국민의 시위와 자료, 보상, 기념사업 서류를 포함하고 있다.
등재된 5·18 기록물의 전체 분량은 문서 4271권·85만8900여 페이지의 기록 문서철과 필름 2017컷, 사진 1733장 등 방대하다.
유네스코가 5·18민주화운동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한 이유는 5·18이 민주화와 인류의 인권 신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실제 남미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과거사 청산 작업이 단편적으로 이뤄진 반면 5·18민주화운동은 진상 규명, 책임자처벌, 명예 회복, 피해보상, 기념사업 등 5대 원칙이 모두 관철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에 따라 5·18민주화운동의 경험을 전례로 필리핀, 태국, 중국, 베트남, 홍콩 등 아시아 곳곳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기록물 체계적 수집·보관
5·18민주화운동 관련 기록물은 기억으로의 역사로 후대에 전승하기 위한 작업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광주광역시는 세계기록유산 소장 기관으로 인류의 공동 유산인 5·18민주화운동 기록을 체계적으로 수집해 영구 보존하고 역사적 의미를 세계인들과 함께 공유하기 위해 2015년 5월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을 설립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는 그동안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던 5·18민주화운동 기록물들이 체계적으로 수집·보관돼 있다.
특히 1980년 5월 당시 생생한 역사적 현장인 옛 가톨릭센터에 위치하면서 접근성을 높였으며 1층부터 6층까지 전시실마다 '항쟁' '기록' '유산' 등 각각 테마를 선정해 기록물을 상시 전시하고 있다.
게다가 다음달 28일까지 3층에 마련된 기획전시실에서 '금남로에 있었다'를 주제로 5·18민주화운동 41주년 기념 특별기획전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제주4·3 관련 기록물의 경우 후대전승을 위한 인프라는 열악한 실정이다. 상대적으로 제주4·3평화재단은 접근성이 취약한 지역에 위치한 상황으로 제주만의 역사로 남을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제주4·3이 한 시대의 고통스러운 역사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우리 역사를 기억하는 새로운 출발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게다가 기록유산 등재에 앞서 전국화·세계화 등을 위한 공감대 형성 작업도 요구되고 있다. 양경익 기자
[인터뷰] 안종철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부위원장
"제주4·3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해서는 4·3이 독자적으로 지닌 인권·민주적 상징을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
안종철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부위원장(66)은 제주가 4·3 기록유산 등재를 위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이 같이 제시했다.
안 부위원장은 "제주4·3이 인류의 존엄성을 돌아볼 수 있는 기록임을 설득하기 위해선 4·3만이 갖는 독자적인 의미를 집중 조명할 필요가 있다"며 "나아가 그 의미가 인권·민주적 상징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잘 부각시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1948년 사건인 제주4·3은 영상·사진 등 시각자료 확보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며 "그만큼 생존자들의 구술채록과 국가차원의 명예회복·피해보상 등 전 과정을 면밀하게 살피고 관련 자료들을 집적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기록유산 등재 이전과 이후에 상관없이 후대전승을 위한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면서 "4·3이 갖는 세계사적인, 인권·민주적인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한 심포지엄을 주기적으로 개최하는 등 전국화·세계화에 힘을 기울이길 바란다"고 제안했다.
이어 "5·18 등재 당시 이념적 갈등으로 전국적 공감대가 부족해 무산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면서 "반대이념을 비롯해 기록유산 등재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사안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일을 빈틈없이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양경익·김수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