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당 해녀 이어도 사나-신(新)물질로드 9. 울산 해녀

조선시대 출륙금지령 제주 유민들 정착 기록 등에 등장  
우뭇가사리 채취 등 계절 이동도, 2002년 나잠회 결성
산업화 전후 변화 직접 경험…환경변화 속 존재감 희석 

"저녁에 먹을 쌀이 없어도 물에 들어가면 10원을 벌기나 만원을 벌기나 다 돈이다 아이가. 그러이까네 고생은 해도 즐거븐 거지. 그런데 물에 갔다 오면 피곤해가 아무것도 몬한다. 아이고야. 그 생각만 하믄"

△전복을 잡던 '두모악'

제주 해녀는 우선 제주를 제외한 한반도의 바다 일대를 '밭'으로 삼았다. 경상도를 시작으로, 남해·동해·서해 바다 모두에서 그들의 흔적을 살필 수 있다. 울산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경상남도로 바깥물질을 나간 배경은 경상북도와 비슷하다. 우뭇가사리, 그리고 돌미역 채취가 목적이었다. 시작 시기는 일반의 예상을 훨씬 앞선다. 

조선조 현종 13년(1672) 임자식 울산호적대장(壬子式 蔚山戶籍大帳)에는 1609 년에 11호를 시작으로 1672년~1708년 사이에 185호~197호까지 거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복 채취를 하는 제주 유민을 '두모악'이라 불렀는데, 이들은 일반 백성들과 함께 살지 않고 외딴 곳에 집단거주지를 형성하였다. 경상도 울산부 호적대장에는 '두모악(頭毛岳)'이란 제주 한라산의 고칭(古稱)으로 '둠뫼'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영조 25년(1749)의 울산읍지인「학성지」고적조에도 "두모악(頭毛岳)이 세상에 전해지기를 일찍이 조정에 채복(採鰒)하여 진상(進上)하기 위해 제주의 해민(海民) 약간 호(戶)를 옮겨 왔다. 그 자손들이 성황당(城隍堂)에 살면서 채복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고 있는데…"라는 보다 구체적인 설명이 담겨있다.

정리하면 '제주 해녀들이 울산에서 전복채취를 하며 살았다'는 내용이다. 조선 시대 출륙금지령 등의 사정을 감안하면 전복을 채취하러 울산에 갔다기 보다는 제주를 떠나 떠돌던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는 일'을 따라 모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 5월 7일자 매일 신보에도 제주 해녀의 출향 물질을 살필 수 있는 내용이 실린다. '울산 해조(海藻) 분쟁 해결'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지난 17,8년 전부터 제주 해녀가 연년이(해마다) 이 지방에 와서 잠수 채취에 종사하여 금일에 이르렀으며…, 해녀를 고용하고자 할 때는 부산 목도(영도)에 도항하여 머무르고 있는 해녀들과 출어 시 소요되는 비용 및 채취물의 매매 등에 관한 계약을 한 후 울산의 적정한 곳에 데려다 일을 했다…'고 적고 있다.

가족과 더불어 이주를 하거나 일을 따라 이동한 경우 모두를 살필 수 있는 부분이다.

△출향 해녀 기준 고민

여기서 고민이 생긴다. 출향 해녀의 기준을 어디까지로 잡아야 할까. 

지금도 부산 다대포에서, 울산을 거쳐 남한의 끝 지점인 강원도 거진 바다에서까지 해녀를 만날 수 있다. 제주 출신이거나 제주 연고의 2세대 해녀는 물론이고 제주해녀의 영향을 받은 지선해녀도 있다. 제주 출신이지만 현지에서 물질을 배운 경우도 있다. 

'물질'기술의 전파도 있지만 바다밭 운영 방식이나 조직(잠수계), 공동작업 등을 통한 이익 분배, 해녀굿 유무 등으로 구분이 된다는 점은 중요하다. 

울산에는 해녀로 구성된 '울산나잠회'가 있다. 2002년 사단법인으로 정식 인가를 받았다. 제주 출신으로 울산에 정착한 해녀들과 제주해녀에게 물질을 배운 현지 해녀들을 아우른다. 나잠회를 만든 김이나자 할머니(79)도 제주 출신이다. 일제강점기 돈을 벌기 위해 대마도에 건너간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울산도 부모를 따라 왔다. 제주에서는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바다에서 물질을 배웠다. 결혼 후 충청도와 부산을 오가며 살다 가계가 어려워지자 친정마을로 돌아와 물질을 했다. 혼자 세 딸을 키우면서 어촌계가 만들어진 뒤 힘들어진 해녀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울산 민속의 해에 마을 전체를 박물관으로 만들며 주목받았던 제전마을은 고즈넉했다. 바깥물질 온 제주 해녀를 보고 배운 자생 해녀 집단이 있다는 말에 찾았지만 사람 구경 조차 힘들었다. 마을박물관과 해녀의집을 보고 나니 '관심에서 멀어진'이란 말이 저절로 떠올랐다. 

해녀 수도 줄었다고 했다. 생계와 직결되는 미역 채취 외에도 이곳에서는 제주에서 온 해녀에게 물질을 배웠다는 기억이 남아있다. 

미역 말고는 얕은 물에서 성게나 군소를 잡던 '개머구리' '운단해녀'가 제주해녀의 물질을 어깨 너머 배우고 '전복해녀'가 됐다. 이와 비슷한 얘기를 일본 미에현 미나미보소에서도 들은 적이 있다. 현지에서 만난 90 넘은 일본 아마의 기억이다. "남성들이나 하던 전복 채취를 제주해녀들이 해내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독하다 했었는데 몇 번 보다 보니 우리도 할 수 있겠다 싶더라고. 그래서 하다 보니 여기 아마들도 전복이며 소라를 잡을 수 있게 됐지".

△바다를 지킬 수 있을까

울산의 제주 해녀들 중에는 남편이 울산 조선소에 취직을 하면서 삶의 터전을 옮긴 경우도 적잖다. 명맥이 사라져가는 울산 해녀의 역사를 울산 공업 역사와 연결하기도 한다. 산업화 이전과 이후의 변화를 해녀만큼 직접 경험한 사람들은 없다.

연결하면 일제강점기와 광복, 한국전쟁, 그리고 산업화 과정에서 타지인으로서 살아가야 했던 고단한 삶의 기억들이 남는다. 해안매립, 임해공단 조성, 바다오염 등 어장환경 악화에 따른 해산물 수확 저하까지 지금은 '살아가기'보다 '살아남기'를 택하는 상황이다. 

울산이 해녀들을 위한 지원에 나선 것은 2007년부터다. 탈의장 기능을 갖춘 '해녀의 집'을 조성하고 잠수복도 지원한다.

어촌뉴딜사업과 '해녀'콘텐츠를 꾸준히 연결하고 있지만 여기저기 불편한 소리가 들린다. 개발사업과 관련한 어장 훼손 등 보상 문제로 해녀들이 반발을 한다거나 어업권을 상실한 어촌계가 꾸준한 상황들이 그렇다. 울산에만 10곳 이상의 지역에서 이름만 남은 어촌계를 유지하고 있다. 부산도 전체 어촌계 50곳 중 24곳이 어업권이 없다. 이대로면 해녀의 명맥 만이 아니라 바다를 어떻게 지켜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소주(소중이)를 입고 꼬두박 테왁에 의지해 양장구(성게)를 잡던 울산 해녀도, 잠비(소중)에 꼬끼와 두룽박을 챙겨 물에 들어가는 포항 해녀도 점점 그리운 대상이 되고 있다.

특별취재팀=고미 방송미디어국장,김봉철 부장대우,이진서·김수환 기자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정부 광고 수수료를 지원해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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