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 카톡방에 올라온 사진 한 장을 오래 쳐다본다. 누군가의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고요가 쉽게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멀리 보이는 풍경 속에는 저 멀리 섬과 무리 지은 사람들이 환호하는 듯한 웃음소리, 그리고 파도의 울렁거림, 섬을 한바퀴 돌아 나오는 바람의 여운이 느껴진다. 섬에서 섬만큼이나 고독한 자의 뒷모습을 보는 듯 하단 말이다. 아무 생각없이 고요하기 보다는 생각이 많아서 고요함이 내려앉은 고독을 보고 있자니 그 마음 곁에 가만 앉아 있는 것처럼 소리없는 한숨이 새어 나온다. 자세히 보니 알듯도 한 예술가다. 요즘 사는 속내를 모르더라도 감히 짐작되는 바가 있어 심연을 따라 걷는 걸음이 무겁고 아득하다. 

노년의 고독은 필수적이라는 말도 심심찮게 들린다. 더러 맞는 말이라 인정하면서도 정함이 밀려온다. '하루 세끼 걱정하면서도 고독을 들기라고?'라면서. 극심한 생존의 위협과 안전과 안정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환경 안에서 고독을 즐기라는 말은 전혀 공감능력 없는 사람의 자기중심적 발언처럼 여겨진다. 오히려 저항감이 생기면서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상종 못 할 사람'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고독을 즐길 수 있는 기본적인 토대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기초생활의 보장과 가족, 친구, 이웃과 같은 친밀한 인간관계가 그나마 살아있음의 기쁨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 옛날 은둔자적인 생활을 하면서 철학한 사람들은 기본생존권이 보장된 환경이었나?'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질문이 꼬리를 물면서 내 안에서 웅성거릴 뿐 이러나 저러나 시원찮다.

그 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 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 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 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 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그 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 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성복의 시 「그날」 전문)

오랜만에 다시 읽는 시, '그날'이 한없이 슬프다. 특정한 그 날이 아니라 매일의 그날이 이럴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40년도 더 된 시이지만 그대나 이때나 별로 달랄 질 것은 세상에 대한 한탄은 과한 감정의 소모가 아닐 것이다. "굶어죽진 않잖아"라고 애써 항변하는 이도 있겠지만 하루의 노동과 향락이 겨우 살고자 하는 몸부림일 것이라 상상한다면 내뱉은 말의 논리는 빈약하고 말 것이다. 겨우, 버티고, 있는 존재들의 몸부림이란 눈물겹다 못해 처절한 것이다. 

영화 '노 웨어'를 모성영화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국가폭력, 재난상황에서 버려진 존재가 어떻게 버티고 살아남는가를 보여주는 영화다. 극적인 상황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기 위하여 임신한 여성을 주인공을 내세웠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국가적 재난 또는 폭력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이 사회에서 권력이 맨 먼저 버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임신한 몸으로 망망대해에 버려진 주인공 미아( 안나 카스틸로 역)는 학살을 피해 간신히 컨테이너에 의지해 살아남는다. 혼자의 몸으로 생존의 위협과 맞서 싸우며 아이를 낳는다. 하지만 당장 먹을 게 없는 상황에서 아이와 자신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살아있는 물고기를 잡아먹고, 겨우 버티는데 컨테이너가 가라앉기 시작한다. 물에 뜨는 용기를 이용해 뗏목을 만들고 겨우 해안가로 도착해 어부에 의해 구조된다. 그녀를 구한 건 그녀 자신이었다. 

노 웨어(Nowhere), 아무 데도 갈 곳이 없다는 뜻이다. 삶이 도착한 곳이 사면의 바다로 둘러싸인 절벽이라면 어디로, 어떻게 갈 것인가. 물고기의 밥이 될 것인가? 새가 되어 날아갈 것인가? 그 안에서도 탈출구는 있으니 고독을 즐겨라는 말은 제발 하지 말기로 하자. 고독한 철학자의 아포리즘을 외우자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 웨어는 누구나의 현실일 수도 있다는 자각이 소름끼치게 무섭다. 망망대해에 버려진 컨테이너 속 임산부는 하나의 은유다. 내 안의 생명을 가진 자가 이렇게 나아갈 길을 완전히 봉쇄당했을 때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질문하는 것이다. 
그렇다. 최소한의 먹이를 구하고, 살아있음을 알리는 방법과 지치지 않고 버티는 방법을 궁리하고, 에너지를 보존하기 위해서 내 몸을 최대한 보호하고 심신에 호흡을 불어넣어 줘야 한다. 그러면서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여기저기서 버티기 힘들다는 신음소리가 들리는 오월이다. 그럭저럭 손님이 많았던 카페를 운영하던 후배도 문을 닫았다고, 오지 말라며 미안한 목소리로 문자가 왔다.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한창을 서성거렸다. 그런 날들이 많아지고 있다. 오월이 오열로 읽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담장에 길게 뻗은 장미가 한없이 곱다고 오롯이 감탄할 수 있는 감각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서너끼의 완전한 식사를 원하지 않고 다만, 인간답게 살 수 있기를 바라는 오월이다. 그러기엔 너무나 많은 생명이 순식간에 짓밟히고만 오월이다. 영화가 아니라 역사이며,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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