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눈이 번쩍 뜨인 이유는 어제 심은 봉숭아, 백일홍의 생존이 궁금해서이다. 지인에게서 봉숭아꽃이 "도났다"며 파가라는 문자가 왔다. 꽃씨를 받아주라는 나의 부탁을 기억했다가 문자를 보낸 것이다. '도나다'라는 말은 참 정겹다. 곡식이나 꽃씨 같은 것이 떨어져서 생각지 않게 싹이 났다는 말인데, 반갑기도 하고 때로는 애물단지가 되기도 한다. 집 앞 공터 공사로 굴삭기 발 아래 놓일 뻔한 봉숭아꽃, 백일홍은 어머니집 마당에 심었다.
아침 이슬을 머금은 신생아 꽃들은 아침이 되자 말동말똥 해졌다. 이제 뿌리를 내릴 준비는 다 된 것 같다. 밤그늘 덕분에 한시름 놓게 되었다. 꽃 앞에 가지, 호박, 수박이 자라고 있다. 가지와 호박은 꽃이 벙글었고, 수박은 짚 속에서 안전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좁은 마당에 이꽃 저꽃, 이 나물 저 나물이 함께 자라고 있다. 별다른 거름도 주지 못하는 처지지만 초여름의 향기는 진득하니 무르익어가고 있다. 올여름의 앞마당은 유난히도 시끌벅적할 것 같은 예감이다.
마을버스 하루 네 번 들어온단
천마산 자락에 짐을 옮겼다
돈 버는 일에도 지치고
세상살이도 그만 힘에 겨워서
그동안 내가 지니고 쌓아왔던 것들
얼마쯤 버릴 요량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곳에 와서 생각해보니
나야말로 가진 것 없어서
버리려야 뭐 아무것도 버릴 게 없는 위인이다
어느 생각 한 줄기 꿋꿋이 뿌리내린 것 없고
됨직하게 익은 마음 한 사발 찾을 길 없다
우습다 비어도 남보다 한참 텅텅 빈 주제에
나는 어쩌자고 겁도 없이
이 아득한 산골까지 흘러왔느냐
한데 가슴 사무치는 서러운 시절과
제 눈물조차 핥아먹는 갈증도 없이
무슨 향기 짙은 열매로 익어, 나는 떨어지리
적막한 마루를 하루종일 뒹굴어도
자꾸 목이 칼칼하고, 철없이 누가 그립기만 하다
죄없는 늙은 어머니만 여름 뙤약볕에
텃밭 오이넝쿨처럼 말라가고
(박규리 시 「천마산 그늘」 전문)
가끔 비워야 할 무언가 있는 사람처럼 으스댈 때가 있다. 산과 들, 바다, 밭을 찾는 이유가 비우기 위해서라는 대답을 자주 듣게 된다. 비울 게 있으면 그냥 비우면 되는데, 왜 굳이 산과 들, 바다를 찾는가. 위 시에서라면 "꿋꿋이 뿌리내린 것 없고 됨직하게 익은 마음 한 사발 찾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적막한 마루를 하루종일 뒹굴어도 자꾸 목이 칼칼하고, 철없이 누가 그립기만" 하기 때문이다.
가끔 어머니집 마당을 찾는 이유도 말로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라고 하지만 실상은 내 안의 내가 그리워서가 아닐까 싶다. 내 삶의 뿌리가 안전하게 착상되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있을 터이다. 쉰을 넘긴 나이가 되어도 신생아처럼 삶은 뒤뚱거린다.
토마스 슈투버 감독의 영화 '인 디 아일'을 보았다. 정말 오랜만에 좋은 영화를 보고 오래 마음이 젖는다. 누구나의 고독이 있을 테지만 영화 '인 디 아일'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오랜 침묵이 가슴으로 느껴진다. '인 디 아일'은 제68회 베를린 국제영화제의 황금곰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영화는 이 대사로 시작한다. "바라는 게 뭐예요? 이루어진다면요". 슈퍼마켓에 입사한 크리스티안에서 선배직원인 브루노가 말한다. 유니폼을 나눠주고, 단추메는 것을 봐주고, 칼과 같은 준비물을 챙겨준다. 그리고 지게차로 짐을 싣고 내리는 것을 봐준다. 실수에도 자애롭고, 침묵에 익숙한 크리스티안의 성격에도 답답해하지 않고 기다려준다. 그렇게 새로운 직장생활에 적응해가며 크리스티안은 마리온이라는 영성을 사랑하게 된다. 물론 이벤트라고 할 것도 없이 그냥 슈퍼마켓 통로에서 눈빛을 교환할 뿐이다.
고작해야 자판기 앞에서 만나 커피 한 잔 티격태격 나눠 마시는 정도가 연애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 브루노로부터 마리온이 처한 사정을 듣는다. 남편이 있는 여자이며,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곤 며칠 동안 마리온은 결근을 한다. 별 이벤트는 없다. 그냥 기다릴 뿐이다. 답답하고 초조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브루노의 초대에 응하고 함께 술을 마시기도 한다. 그리고 다음 날, 브루노의 부고 소식을 듣는다.
영화는 종잡을 수가 없다. 스릴러 같기도 하고, 멜로드라마 같기도 하다. 딱 하나의 장르로 규정할 수 없는 특징을 가졌다. 그리고 죽을 것 같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크리스티안이었는데, 실제로 죽은 이는 브루노다. 가장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준 인물이다. 삶의 아이러니를 감독은 영화 그 자체로 보여준다. 음악은 기괴스럽다가도 너무나 안온하고 아름답다. 삶과 세계의 다면성이 하나로 연결돼 있는 큐브와 같다.
영화는 크리스티안이 지게차에서 파도소리를 들으며 브루노와 바다를 떠올리면서 끝난다. 지게차에서 파도소리를 듣다니. 어쩌면 크리스티안이 어두은 통로를 뚫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든다. 사방이 물건들로 가로막혀 있는 슈퍼마켓의 세계 안에서 파도소리를 들을 수 있고,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그래도 살만하지 않겠는가 하는 안심이 된다. 다만, 뿌리 내릴 수 있도록 누군가 오래 보살펴주었으면 한다. 마당에 심은 봉숭아꽃도 완전히 뿌리를 내리기까지는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아야 하듯이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