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무화과 풍년이다. 무화과(無花果)는 말 그대로 '꽃이 없는 열매'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꽃이 없이 열매가 열리는 것은 아니다. 꽃이 필 때 꽃받침과 꽃자루가 길쭉한 주머니처럼 굵어지면서 수많은 작은 꽃들이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꽃이 주머니 속에 갇혀 있어서 꽃가루가 바람에 날릴 수도 없고, 벌이나 나비를 불러들일 수도 없다. 하지만 무화과좀벌이라는 전용 곤충을 불러들여 무화과나무의 수정을 도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꽃은 피고, 열매를 맺는다. 열매 속에는 수많은 꽃들이 피어있다. 그러니 무화과를 먹는 것은 주머니 속에 피어 있는 꽃을 먹게 되는 것이다.
무화과 나무 아래 백합이 핀 걸 이제야 알았다. 무화과에 정신이 팔려 그 아래 백합이 자라고 있다는 것도 잊은 것이다. 지난해 언젠가 알뿌리 하나를 얻어다 심은 것 같긴 한데 이렇게 피어날 줄이야. 기억은 사라져도 생명은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불쑥불쑥 잊었던 생명이 피어날 때마다 움찔움찔 놀라게 되는 것은 내가 무엇을 한 것인지 기억이 가물거리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내가 언제?"라는 말이 절로 나오고 있는 것이 나를 못 믿게 만드는 증거다. 그건 그렇고 무화과가 익으면 나눠주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어서 익을 때까지 관리를 잘해야 한다. 가지치기를 못했기 때문에 가지들이 땅으로 내려오고 있다. 게으른 탓도 있지만 아는 게 없어서 때를 놓친 것이다. 또한 잦은 비가 걱정이다. 무화과가 익어갈 무렵에 잦은 비는 갓 피어나려고 하는 꽃을 꺾어버리는 것과 같다.
나는 피고 싶다.
피어서 누군가의 잎새를 흔들고 싶다.
서산에 해지면
떨며 우는 잔가지 그 아픈 자리에서
푸른 열매를 맺고 싶다 하느님도 모르게
열매 떨어진 꽃대궁에 고인 눈물이
하늘 아래 저 민들레의 뿌리까지
뜨겁게 적신다 적시어서
새순이 툭툭 터져오르고
슬픔만큼 부풀어오르던 실안개가
추운 가로수마다 옷을 입히는 밤
우리는 또 얼마나 걸어가야
서로의 흰 뿌리에 닿을 수가 있을까
만나면서 흔들리고
흔들린 만큼 잎이 피는 무화과나무야
내가 기도로써 그대 꽃피울 수 없고
그대 또한 기도로써 나를 꽃피울 수 없나니
꽃이면서 꽃이 되지 못한 죄가
아무렴 너희만의 슬픔이겠느냐
피어도 피어도 하느님께 목이 잘리는
꽃, 오늘 내가 나를 꺾어서
그대에게 보이네 안 보이는
안 보이는 무화과나무의 꽃을
(박라연 시, 「무화과나무의 꽃」 전문)
기도가 나를 꽃 피울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적이 있다. 지금도 그 믿음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어쩌다 기도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마냥 기다릴 만한 그 무엇이 되지는 못한다. "꽃이면서 꽃이 되지 못한 죄"가 있다는 것도 삶이 가르쳐주고 있다. 죄는 짓지 않았지만 죄가 되는 그런 일들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애초부터 피우지 못할 꽃이라 여기며 꿈조차 꾸지 않는 건 비열하다. 꿈은 이루는 것이고, 사랑은 통과하는 것이다.
어느 뜨거운 여름날에 날씨보다 더 뜨거운 영화 '당갈'을 보았다. '당갈'은 2010년 영연방 경기대회에서 인도 여성 레슬링 선수 최초로 금메달과 은메달을 획득한 기타 포갓과 바비타 포갓 두 선수가 모델인 영화이다.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 마하비르 싱 포갓(아미르 칸 역)'은 아버지의 반대로 금메달의 꿈을 접은 전직 레슬러다.
아버지 미하비르 싱 포갓은 아들을 통해 꿈을 이루겠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딸만 넷을 낳으면서 꿈은 좌절된다. 그러던 어느 날, 두 딸에게서 잠재력을 발견한다. 그리고 레슬링 특훈에 돌입한다. 딸들을 훌륭한 레슬러로 티우겠다는 결심에는 "우리 딸들은 멋진 여자가 돼서 결혼할 남자를 직접 고르게 될 거야."라는 생각이 있었다.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권의식이 부족한 인도에서 여성 레슬러가 된다는 건 따가운 시선과 조롱을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딸들은 아버지의 혹독한 훈련에 힘입어 꿈을 이루었다. 아버지가 해준 말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다. "너희를 기억하게 하는 방식으로 싸워서 이기는 거야. 너희의 승리는 수백만 여성의 승리가 될 거야. 여자를 하찮게 보는 모든 사람과 너는 싸우는 거야".기억하게 하는 방식으로써 싸운다는 말, 정말 멋있는 표현이다. 아직 꽃피우지 못한 숱한 존재들이 '자신을 하찮게 보는 사람들과 싸운다'는 기분으로 있는 힘껏 역량을 키운다면 언젠가 꽃피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무화과처럼 꽃은 속으로도 피어나는 것이나 너무 드러나는 것에 몰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