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제주도 2. 조총 

조선 1760년 부산진에 상륙한 왜군 조총부대. 부산진 순절도 부분. 육군박물관 제공
조선 1760년 부산진에 상륙한 왜군 조총부대. 부산진 순절도 부분. 육군박물관 제공

조총의 위력 변방 해안 방어에 적격
사슴 잡는 포수 해학과 위트가 넘쳐 
기념비적 「탐라순력도」 사가기록화
 

△조총을 무시했던 조선 

화승총은 조총이라고도 하는데 15세기 유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화승총은 총신(銃身)의 오른쪽에 화약접시(Pan)와 뱀 모양의 용두(龍頭:Serpentine), 불심지(繩:Match), 방아쇠와 스프링 등이 결합된 격발잔치를 장착하였다. 이를 불심지 점화식 소총(Matchlock Musket)이라고 하는데 비로소 총자루, 격발장치, 가늠쇠가 있어서 조준 사격이 가능해졌다. 일명 '아쿼버스(Arquebus)'라고 불리는 초기 화승총은 15세기 전반 오스만 투르크 제국(1299~1922)에서, 1457년 전후의 시기, 유럽 등지에서 출현했다. 조총의 전래에 대해서는 중국 전래설, 일본과 티베트(西蕃)설, 남이번국(南夷蕃國:베트남, 태국 등) 등지에서 들어 왔다는 설이 있다(최영창·국립진주박물관·2019·p365). 조총의 일본 전래는 1543년 포르투갈 인이 다네가시마(種子島)의 영주 도키타카(種子島時堯)에게 조총을 2정 팔았고, 도키타카는 그 중 1정을 분해하여 복제하는데 성공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1592년이 되면 왜군들은 이 신형 무기를 수만 정이나 보유하게 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정벌에 나서게 되었다(민승기·2004·p257~267).  

조총의 중국 전래는 왜구들이 보유한 조총을 남획하면서 시작되었다. 왜구 퇴치에 앞장 섰던 명나라 세습직 등주위지휘첨사(登州衛指揮僉事·정4품)로 벼슬을 시작하여 왜구들이 극성을 부릴 때 복건성 총독(福建省總督)이었던 척계광(戚繼光,1528~1587)은 그가 쓴  「연병실기(練兵實紀)」에서 "이 무기(조총)는 원래 중국에 존재하지 않았고, 왜구에게 전해져서 비로소 얻게 된 것(此武中國原無  傳自倭夷 始得之)"이라고 하여 중국 연안에 자주 출몰한 왜구에게서 노획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조선이 조총의 존재를 아예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조총을 처음 본 것은 1589년(선조 22) 홍윤길(黃允吉) 등 조선통신사 사절단이 일본에 갔다오는 길에 쓰시마 영주로부터 조총 몇 자루를 선물 받고 온 것이 조선 전래의 시작이었으나, 당시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조선정부는 조총을 그냥 방치해버렸다.     

조총병이 말에서 떨어져 조총을 손에 들고 말을 쫓고 있다. 탐라순력도 교래대렵 부분. 육군박물관 제공
조총병이 말에서 떨어져 조총을 손에 들고 말을 쫓고 있다. 탐라순력도 교래대렵 부분. 육군박물관 제공

△유머스러운 포수의 해학

제주도 기록 중 조총이 언급된 대표적인 문헌은 1653년 「탐라지」와 「제주속오군적부」  「탐라순력도」가 있다. 실제로 조총을 사용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 기록은 「제주속오군적부」의 전투편제가 나온다. 「제주속오군적부」는 전국 속오군에 관한 기록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자료로 그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데 지방군에 대한 특별한 전투 편성이 흥미롭다. 제주 지방군의 대오 편성은 중국 척계광의 「기효신서」나 「연병실기」의 영향을 받은 형식을 유지하고 있지만 무기 편성에서는 등패수, 낭선수, 장창수, 당파수 등 창을 제외한 살수(殺手)는 없어지고 사수(射手:궁수) 2명, 포수(砲手:조총병) 4명. 창수(槍手) 4명으로 이루어진 것이 조선의 중앙군·타지방군과도 다르다. 제주 군사편제에 눈에 띄게 다른 것은 궁수가 조총 앞에 배치되고 이어서 2열~4열까지 조총수가 많이 배치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칼과 창의 운용이 능숙하여 근접전에 강한 왜구의 해안 상륙을 미리 저지하기 위해서 원거리에서 먼저 타격할 수 있는 활과 조총의 위력을 변방에 적극적으로 적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적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총의 위력 앞에 쉽게 무너진 조선군에 대한 개혁이 절실했다.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것이 무기의 성능이기 때문에 결국 활보다는 총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인식으로 바뀌어 적을 막는 데는 총포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1650년 효종이 즉위하자 왕은 조총을 무척 선호했지만 과중한 군비(軍費) 때문에 전면적으로 포수를 양성할 수가 없어 "힘이 없는 자는 조총을, 힘이 있는 자는 활쏘기를 익히도록 구분해서 권장했다. 

역사적으로 중국이나 조선의 모든 위기는 변방에서 시작되었다. 효종의 강병(强兵)을 위한 영향 때문인지 대정현과 정의현에 비해 제주영(濟州營)에만 조총이 무려 1,164문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 조총이 하멜의 노획물인지는 모르겠으나, 변방의 상황은 점점 활보다는 총포의 중요성이 증가하고 있었다. 

조총을 운용하고 있는 포수들의 모습은 1703년 「탐라순력도」 「교래대렵(橋來大獵)」에 나온다. 이 그림은 조총으로 사슴과 노루를 사냥하는 수렵 장면을 그린 것이다. 사슴을 겨냥하고 있는 조총수, 사슴을 쫓다가 말에서 떨어지더니 벌떡 일어서서 말을 쫓아가는 조총수가 허둥대는 모습에서 화공의 우스꽝스런 해학이 돋보인다. 이 수렵도를 그리게 된 이유는 대정현 감산리 유배인 오시복의 조언으로 마침내 「탐라순력도」가 그려진 것이다. "앉아서 생각컨대 오늘의 이 위의(威儀:사냥)는 진정 남자가 할 일이니 나중에 친지들이 그 성대한 거사를 볼 수 있도록 돌아와 화공으로 하여금 그리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탐라순력도」가 이형상 개인의 '사가 기록화(私家記錄畵)'라는 이유가 이 말에 담겨있다.  

조선시대때 왜군이 쓰던 조총.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시대때 왜군이 쓰던 조총.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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