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감을 주워 오면서 혹독한 기억을 한다
전염병으로 자식을 둘이나 잃고 미치지도 못한
서슬 퍼런 날 견디어 온 엄마

한 방울의 찌꺼기도 남기지 않고 꾸욱 감즙을 짰다
남편 중병 들고 살림살이 쪼그라들어 새끼들은 배가 고팠고
참새보다 부지런 떨어도 죽으로 끼니 때운 적 많았다

땡감즙에 광목을 담그고 허리 휘도록 치댔다
머리까지 퍼런 물 차올라 숨이 가쁜 엄마는
가슴속 응어리 풀어지기도 전 기억을 잃었다

무거운 광목 빨랫줄에 널었다
수술실에서 깨어난 엄마 숟가락 여러 번 놓치고
걸음마 연습으로 다시 일어서려는데 해는 산을 넘고 있었다

구김살 광목 팽팽하게 말랐다
종일 엄마를 만났는데도
몇 번을 더 적시고 말려야 할지 감히 알지 못한다
김춘자 시, 「감물 들이기」 전문 

감나무에 오촉 백열등이 켜졌다. '벌써'라며 눈을 의심해본다. 연이은 폭염과 열대야 속에 감나무도 정신을 차릴 수 없나 보다. 마당에 심어진 깻잎, 물외, 호박, 가지, 고추, 콩, 봉선화, 백일홍 등도 더위에 말라가고 있다. 깻잎은 잎사귀가 다 녹아버렸다. 호수를 물을 뿌려봐도 소용없다. 스치듯 내린 비는 발을 딛기도 전에 말라버렸다. 느닷없는 천둥번개도 있었던 듯 하나 갑자기 쏟아지는 햇살은 이 모든 걸 지워버렸다. 올 여름은 감물 들이는 일을 하지 못했다. 풋감 따는 시기를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늦게라도 해볼까 하고 감물 사이트를 뒤져보니 올해는 마감했다는 문구만 보인다. 누군가에게 말했더니 그냥 감물들인 걸 사 입으라고 한다. 그야 누가 모르나. 옷이 없어서가 아니라 감물 들이는 그 경험이 주는 알뜰함과 색감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햇살 아래 공목천의 구김살이 펴지는 풍경을 상상만 해도 정겹고 편안해진다. 몇 차례의 색빠짐을 건너고 건너 비로소 만들어지는 시간의 색. 그 색을 찾기 위해 자연물을 이용한 물들이기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때로는 강렬한 색을, 때로는 은은한 색을 선호하게 된다. 색은 내 감정의 흐름을 잘 알 수 있는 기호이다. 색에 대한 생각이나 감정도 변한다. 빨갛다고 다 열정적이고 따뜻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빨강이 주는 강렬함이 우울을 불러오기도 하는 것이다. 파란색이 따뜻하다고 느껴본 적 없다. 그런데 요즘은 파란색이 따뜻하다고 느껴진다. 아마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영화인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의 눈길을 끈다는 것은 그에게서 느껴지는 에너지가 강렬하다는 뜻이다. 에너지는 색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사랑과 예술, 정체성에 관한 영화다. 주인공 '아델'은 책을 사랑하는 학생이다. 그리고 '엠마'는 파란 머리의 화가 지망생이다. 그 둘은 어느 날 횡단보도에서 눈을 마주친 적이 있다. 책 속에서 꿈을 꾸는 아델과 감각적으로 현실을 느끼는 엠마는 서로를 사랑하게 되고 서로의 삶 속으로 깊게 끌어들인다. 그래서 평온은 깨지고 흔들림 속에 감정은 거친 바다를 유영한다. 영화는 왜 블루를 따뜻한 색이라고 하고 있는가. 보통은 차가운 색이라고 알고 있는 파란색에 대한 편견을 깨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혼돈과 저항의 의미이기도 하다. 고흐의 그림 배경에는 유독 파란색이 많다. 어쨌든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세상의 편견어린 시선과 맞선 사랑에 대한 따뜻한 어루만짐이 있는 영화다. 답을 알려주기보다는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느린 영화다. 

밤하늘 위로 짐승이 걸어가는 울음소리
그 아래 그들 똥을 받아
시를 쓰는 시인의 방

이런 날 밤
집 근처에 숨소리 가득 다가옴

하늘이 와서 몰래 글씨를 쓴다

풀잎을 돌그랗게 먹은
벌레 입 자리가, 바로 그 상처가
하늘의 글씨다
당신이 계시는 블랙홀들

길 밖에 더 큰 길이 있다
이성선 시, 「하늘의 글씨」 전문

세상에서 가장 늘어터진 사람이 시인일 것이다. 정답이 없는 세상을, 정답이 있다고 부득불 고집부리는 물음에 화답하기 위해 하늘을 쳐다보거나 땅에 코를 박는 이들이다. 어쩌나 무릎을 기가 막힌 언어는 하늘이 쓴 글씨일 뿐이지 시인이 만들어낸 말은 아니다. 그마저도 고집스럽게 고백해버리면 할 말 없을 터이다. 감나무밭에 감 하나가 노랗게 물든 건 하늘이 색칠한 것이라 봐야 하나? 하늘이 한 일을 누가 알겠는가. 그런데 왜 하늘은 자꾸 노하지? 무엇이 그리운 건 아닐까? 세상에서 서로를 가장 사랑하는 아델과 엠마도 말했다. "나는 당신이 그리워요. 우리가 그리워요"라고. 보고 있어도 그립다고. 살면서도 삶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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