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조울증이 심하다. 지구가 불안하다. 전에 없는 무더위 추석을 보내고, 태풍 소식과 함께 주말 내내 비는 추적였다. 태풍에 대한 무서운 기억이 있어 마음 단단히 먹고 있었는데 구멍난 풍선처럼 태풍은 기운을 잃어보리고 만 것 같다. 좋아해야 할지 어떨지 표정관리가 어렵다. 긴장도가 높으니 몸은 찌뿌둥하고 마음은 괜스레 쳐져 있다가 밖을 나선다.
앞서 달리는 차에 시선을 두고 멍하니 달리다 갑자기 눈이 환해지는 풍경을 만났다. 양배추를 실은 트럭의 양옆에 장화가 한쪽씩 깃발처럼 걸려 있는 것이다. 언뜻 보면 트럭에 코를 박은 군인의 장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뒤에서 하도 빵빵대는 소리에 추월하고 싶은 충동도 있었으나 내 앞에 펼쳐진 극사실화가 왠지 모를 위안이 되어 뒤차들을 무시하기로 한다.
지금 내게는 극사실적인 어떤 이미지가 필요한가 싶기도 하다. 불안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차라리 태풍이 오는 것이 맞다. 올 것이 안오면 불안하다. 더 큰 것이 밀려올까봐 불안한 것이다. 이토록 태풍이 와야 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내 의식에도 새로운 문장이 생겼다.
태풍이 오고 창궐하는 남하(南下)들을 보았다 파도와의 사이에 낳은 자식이라고 네가 말할 때 목적들이 외로워졌다 태풍이 오고 씨 없는 외물(外物)에 근육이 생기는 걸, 눈물인 걸, 유모는 달래본다 숙면에 필요한 빛을 땅 밑에서 찾는 법에 대해 당신은 이미 온 것이 이미 오고 있다고 말했다 태풍이 오고 나는 돌과 악수하고 지푸라기가 내 결심을 바꿔치기 하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태풍이 오고 각 문마다의 적령기를 가르치던 일 하루 두 번 송곳니로 방문하던 일 표적 한가운데 다른 사람을 그린 일 이 여행이 헛걸음이도록 점점 명령하게 되는 구름들 아래 태풍이 오고 어른들은 편지를 쓰고 죽으려고 했고 우리는 재미나 죽으려고 했다 태풍이 오고 변하지 않는 것들은 이미 탐구의 범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한번도 땅거미가 우리를 그냥 지나친 적은 없었다 슬플 수가 없어서 너를 강간하던 일 줄지어 가던 개미들의 질서조차 비정(非情)하던 일 태풍이 오고 소실점을 향해 발정해 있던 너의 의학사전에게로 태풍이 오고 크고 아름다운 인조(人鳥)와 함께 태풍이 오고 너는 나를 버려라 하지만 내게 달린 여성은 아주 작아서 버려야 할 신체조차 되지 못한다
조연호 시, 「태풍이 오고」 전문
의미를 알 수 없는 시에 오래 머물러본 경험은 몇 안된다. 위 시가 그렇다. 도대체 뭐라는 거야 볼멘소릴 하다가 입을 틀어막는다. "파도와의 사이에 낳은 자식이라고 네가 말할 때 목적들이 외로워졌다"에 왜 라고 묻다가 "태풍이 오고 어른들은 편지를 쓰고 죽으려고 했고 우리는 재미나 죽으려고 했다"에서 어깨가 무너진다. 그 시절이 태풍이 들이닥친 게절에 우리집 풍경이 이랬기 때문이다. 놀이에 빠진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웃는 모습을 경멸하던 어른들의 표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생각 없는 어른들이 생각 있는 아이들에게 생각 없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서부터 어른과 아이가 소통할 수 있는 소실점은 무너지고 만 것이다. 마치 영화 '가을소나타'의 에바와 샬롯처럼 말이다.
유명 피아니스트인 엄마 샬롯(잉그리드 버그만 역)은 딸 에바(리브 울만 역)의 초대를 받아 방문한다. 샬롯은 연주 여행으로 바쁘기도 했지만 연인 레오나르도의 죽음으로 마음의 상처가 회복되지 않은 상태다. 둘의 만남은 7년 여만에 만난 셈이다. 딸 에바는 여느 때처럼 엄마를 맞이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서먹하고 엄마의 시중을 드는 게 힘들다. 그리고 동생 헬레나(레나 니먼 역) 간병도 해야 한다. 엄마는 딸 헬레나가 심한 장애를 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주여행을 포기하지 않았다. 세계적인 명성은 얻었으나 그녀의 마음도 허하기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오랜 침묵은 어느날 밤 깨지고 만다. 폭풍처럼 밀려오는 감정을 견딜 수 없었던 건 에바였다.
때맞춰 이름을 달리해 찾아드는 태풍 같은 너
나는 뒤집어 벗어놓은 양말같이 무력하다
날아간 지붕과 함께 겉과 속의 경계도 허물어졌다
(중략)
신발 안을 굴러다니는 성가신 돌 조각 같은, 별들
풍속 너와 나 사이의 큰센바람에 쓸려 다닌다; 그것이 태풍의 일
갈 곳 잃은 꿈들이 갈수록 세를 더해 사나워지는 것
속엣것들을 죄다 휘젓는 태풍만을 사랑하는 사람; 그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하는 일
체념의 깊이만큼의 강우량 속에서 추깃물을 흘리는 이 밤의 비정(非情)
태풍과 태풍의 눈 다시 고요와 극렬의 징검다리를 오가는 마음
불게 하기는 쉬워도 머물게 하기는 어려운 바람
폭우를 거두기엔 너무 성긴 자기모멸의 씨실과 온기의 날실
폐허를 짓고 스러지는 네 뒷모습
이현호 시, 「혼자 무렵의 태풍」 부분
샬롯과 에바, 둘 사이의 사나운 애착은 폭풍같은 분노로 포효했고, 겉잡을 수 없는 감정의 파고가 삶으로 파고들었다. 결국 엄마는 떠났고, 딸은 미안하다는 사과의 편지를 쓴다. 떠나는 게 맞는지, 사과의 편지를 쓰는 게 옳은지 모르겠다. 그만큰 서로에게는 딸과 엄마라는 뿌리치지 못하는 애착이 있다는 뜻인데 급작스런 폭풍우에 뒷감당을 할 수 없었다는 씁쓸할 따름이다. 꾹 숨겨둔 감정의 회오리는 언젠간 터지게 마련이며 지나친 자존감은 오만, 허영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보여준 영화가 '가을소나타'이다.
날씨에 조울증을 보이는 것은 지구의 표면과 내부가 심각한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 상징으로 보인다. 언젠가 터질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듯한 폭풍 전야와 같은 느낌이랄까. 나의 넘치는 욕망이 지구의 어느 부분에 상처가 되고 있을지 돌아볼 시간이다. 엔트로피 이론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체감적으로 충분히 지구와 인간은 각자 곪고 곪아고 있음을 기후는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는지. 트럭 위의 양배추와 굳게 박힌 장화의 형상은 어쩌면 지구에 코를 박고 쓰러진 인간군상이 아닐까 하는 것이 지금, 마침, 도착한 생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