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제주도 8. 기생
기생 기원 양수척과 사치노예
가장 낮은 천민 신분 성노예
유교 윤리에 숨겨진 인권유린
△전쟁의 노예
매음(賣淫)의 봉건적인 형태를 관기(官妓)로 보아, 계급적 분화를 전쟁 포로에서 찾는 것은 오래된 관점이다. 갑골문 '아이동(童)' 자는 포로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한 눈을 찔러버리는 자형이고, '해(奚)'자는 한 성인 남자 혹은 여자의 목을 줄로 묶어놓은 모습이며, 때로는 다른 손 하나가 줄의 한쪽 끝을 끌고 있는 자형이다. 전쟁 포로의 한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쟁의 목적은 상대방을 굴복시켜 자신의 생존을 보장 받으려는 것이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종교, 오락, 자극 등의 원인으로 살인을 했으며, 후세의 전쟁 목적은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서였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말한다. "전쟁과 노예를 통해 발전한 사회는 특권의 중요성이 점차 커져갔다. 사회적 특권으로 인해 에로티즘은 사회의 정상적인 경로가 되었다. 에로티즘은 개인의 힘과 부(富)에 종속됐고, 종국에는 허위에 바쳐졌다. 전쟁과 노예의 등장 탓에 성적인 삶은 제 길을 벗어났으며, 결국 그 자유를 잃어버렸다. 결혼은 꼭 필요한 생식의 자리를 확보해 주었다. 그것은 애초에 자유를 좋아해서 집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하는 남자들에게 더욱 무거운 부담이 됐다"라고.
조선 왕조의 모든 생활세계는 신분위계질서에 의해 구속받았다. 곧, 사람들의 위세, 사회적 관계, 공적인 의무, 심지어 직업까지도 신분에 따라 결정됐다. 신분은 크게 양반·중인· 상민·천민 네 등급으로 나뉜다. 그러나 천민과 대비되는 신분으로 양반·중인·상민을 양민이라고 하고, 천민은 다시 칠반공천(七般公賤)과 팔반사천(八般私賤)으로 나누어졌다. 이를테면 칠반공천은 기생, 내인, 이족, 영졸, 뇌령, 관노비, 유죄 도망자 등을 말하고, 팔반사천이란 승려, 영인, 재인, 무녀, 사당, 거사, 혜장, 백정 등으로 나뉘어졌다. 그렇지만 겉으로 똑같은 천민이라고 해도 실제로 사회적 위세나 차별대우가 똑같던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관노비는 다른 천민들보다 더 많은 자유를 갖고 있었으며, 양반들의 유희대상이었던 기생들은 지배층의 생활방식에 더 가까이 어울렸다. 그렇지만 명망이 있는 기생이나 양반 권력자들이 총애하는 기생이라면 매우 특별한 대우를 받기도 했다.
신분사회는 인간을 등급과 서열로 차별지우는 사회다. 조선시대는 적서차별, 남존여비의 끝판왕이었지만 그 이데올로기는 오늘날 여전히 권력과 재력이라는 다른 형태로 우리에게 스며들었다.
△기생 양성소 장악원
조선시대에 기녀가 있다. 일명 기생인데 악공, 악생, 관현맹, 여악, 무동(舞童) 등 기예를 담당하는 연주자와 함께 신분사회의 가장 낮은 천민 집단 중 하나이며 성노예로 살아간 이들이다. 이들은 음악과 무용을 가르쳐 공연과 의례의 연주 등 궁궐 행사를 관장하던 장악원(掌樂院) 소속이었다.
장악원에는 부서와 같이 역할이 다른 좌방과 우방이 있고, 우방 소속 악공들은 국빈을 대접하는 잔치인 연향(宴享)에 연주자로 참여했다. 또 좌방에 속한 악생은 제례의식 때 사용하는 아악 연주를 맡았다. 좌방은 왕실의 궁궐 내연(內宴)이 있을 경우에는 관현맹(管絃盲)과 함께 연주했으며, 관현맹이란 장악원에 소속된 시각장애인 연주자를 말한다. 이 궁중내 연회에는 무동(舞童)과 여기(女妓)도 참여했는데 무동은 춤추고 노래하는 아이들을 뜻하고, 여기는 춤추고 노래하는 기생을 뜻한다.
조선시대 기녀는 관청에 소속된 관기(官妓)를 말한다. 다시 관기는 한양의 경기와 각 도(道) 소속의 지방기로 나뉜다. 지방의 기생이라도 용모가 미색(美色)이라면 중앙의 기생으로 선택될 수도 있었다. 유득공(柳得恭)에 의하면, 장악원 속악부(俗樂部)에서 기생들이 춤을 출 때 연주하는 악기로는 북·장구·해금·저(笛)·큰 피리·작은 피리 등이 있는데, 이것으로 연주하는 것을 타풍류(打風流)라고 한다. 또 지방 기생들이 궁궐의 의녀가 되기도 했다. 내의원과 혜민서에는 의녀가 있고, 또 공조와 상의원에는 침선비가 있는데 모두 강원도 지방과 삼남(충청·전라·경상도) 지방에서 뽑아 올린 기생들이다.
관기의 신분은 관아에 예속된 노예로 세습됐다. 따라서 여성이 한번 기적(妓籍:기생 등록대장)에 오르면 한평생 빠져 나올 수 없었다. 기생은 15살부터 50살까지 있었는데 어린 기생을 동기라 하고 나이든 기생을 노기라고 불렀다. 동기는 15살에 기적에 오르면 교방(敎坊)에서 음률을 익히기 시작하여 일정한 교육 기간이 끝나면 행수(行首) 기생의 엄한 제재를 받았다.
기녀들도 등급이 있어서 경기(京妓), 지방기(地方妓), 관기가 있었는데 서울 5부에 있는 기녀들은 주탕(酒湯), 은창(隱娼)과 형조(刑曹) 경조부(京兆付)에 하전(下典)이 있었으며, 이 하전은 지체 낮은 지방의 급수비(汲水婢)를 말함이다. 이와 같이 기생의 종류에 일패, 이패, 삼패가 있었는데 관기(官妓)는 일패이고, 일패에서 물러난 기생이 이패이고, 몸 파는 여자인 유녀가 삼패이며, 삼패에서 역으로 이패, 일패로 갈수록 계급이 올라간다.
기생은 양반 사대부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이들은 겉으로는 삼강오륜의 기치를 내걸고 부부의 윤리를 성리학의 강상윤리로 통제하면서 언제라도 칠거지악(七去之惡)의 구실로 부인을 규방에서 쫓아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기생의 기원은 어떻게 될까.
△기생의 기원 여자종
다산 정약용은 수척(水尺)을 관기의 별명이라고 했다. 무자이(巫玆伊)라고 부르는 관비급수자는 물 나르는 급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고려시대 이의민의 아들이 매우 영화롭게 살았는데 양수척(楊水尺)을 기적에 편입시키고, 공물과 세금을 징수한 것이 그 원인이라고 한다. 이로써 남자가 나면 노(奴)로 만들고, 여자가 나면 기생으로 만들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기생이 시초이며 수척이라는 이름의 근본이라고 했다.
또 기생의 본질은 사치노예이며, 전쟁 포로의 처우에서 기생과 같은 부류가 발생하는데 그 시원을 무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원래 무녀가 신 자체였지만, 무녀가 신격과 정치권력의 분화과정에서 점차 퇴행하면서 지방토호와 결부될 때에 그 무녀는 매춘부가 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노는 계집'으로서 무악(巫樂)의 예능적인 면에서 익힌 '놀음', '노롯(아래아)'으로 권력기구의 여악(女樂)의 가척(歌尺), 무척(舞尺)으로 봉사해 기녀가 된다는 것이다. 또 기녀는전쟁의 여자 포로에서 발생한 여비에서 사치노예로 정립할 때도 발생한다. 민족간 전쟁에서 남자는 다 참살되거나 노예로 삼고, 여자는 데려다가 여자종으로 삼는다. 즉 전쟁포로인 남자는 노예가 되어 전리품으로 분배되는 경우, 이들의 배우자인 여자는 여자종으로 삼는다. 포로 중에 아름다운 여인이나 양가의 부녀를 사치노예로서 사유하는 것이 보통이다.



우후죽순 생겨나니, 새로운 왕조들이 좋아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