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건들바람을 맞으며 마을길 걷기를 하였다. 익숙하게 오가던 길이지만 마음을 내려놓고 걸으니 하나같이 낯선 풍경이다. 쑥빛으로 쑥덕대던 오후의 바다도 오랜만에 평정을 되찾고 고요하다. 태풍이 몰려온다는 소식도 있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아랑곳없다.
마을길을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풍경 중에 하나는 물색이 걸려진 할망당의 모습이다. 사실 찬찬히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칠 수도 있는 풍경이다. 마을의 외진 곳이나 건물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구석진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당들은 건물을 지으면서 훼손되거나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로 무너진 지 오래다 마을에서 신경써서 보호하지 않으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라 할 수 있다.
빛바랜 천 원짜리 지폐가 세월의 흔적을 말해준다. 가족의 건강과 마을의 안녕을 염원하며 빌었던 누군가의 기도가 시간 속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이렇듯 시간을 말해주는 어떤 것은 옷깃을 여미게 한다. 시공간의 기운이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더불어 보이지 않는 신을 향해 다하지 못한 애도의 마음도 함께 표하게 된다. 종교를 불문하고 기도의 마음은 숙연하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태양 시계 위에 던져 주시고,
들판에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마지막 열매들이 탐스럽게 무르익도록 명해 주시고
그들에게 이틀만 더 남국의 나날을 베풀어 주소서
열매들이 무르익도록 재촉해 주시고
무거운 포도송이에 마지막 감미로움이 깃들이게 해 주소서
지금 집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지금 홀로 있는 사람은 오래오래 그러할 것입니다.
깨어서, 책을 읽고, 길고 긴 편지를 쓰고,
나뭇잎이 굴러갈 때면, 불안스레
가로수 길을 이리저리 소요할 것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시, 「가을날」 전문
1902년에 쓴 릴케의 '가을날'이라는 시이다.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모든 물상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던 릴케는 열매들이 탐스럽게 무르익을 수 있도록 이틀만 신의 은총을 내려주라고 기도하고 있다. 만약 신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지금 집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는 고백은 슬프다. "지금 홀로 있는 사람은 오래오래 그러할 것입니다."는 기도의 말은 더 슬프다. 홀로 남은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은 기도 외에 또 뭐가 있을까?
나는 이 영화가 왜 코미디로 분류되었는지 모르겠다. 물론 코믹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지만 애도의 형식을 다룬 영화다. 갑작스레 아내를 잃은 제르맹(프랑수아 베를레앙 역)은 실의에 빠질 시간도 없이 가족들의 보호를 지나치게 받는다. 자식들은 시간표를 짜서 포스트잇으로 붙여놓고 돌봄을 하게 되는데, 제르맹에게는 감시와 다름없다.
아내는 죽기 전에 무용단의 일원으로 공연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갑작스런 사망으로 공연에 차질이 생기기도 했지만, 제르맹은 아내가 하던 일을 자신이 이어서 하는 것이 아내에 대한 약속을 지키는 거라 생각한다. 물론 무용을 배워본 적 없는 그로서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가족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무용단에 입단하는데 그의 몸은 서서히 아내를 향한 기도의 마음으로 꽃을 피우게 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를 따르던 오촌당숙이 아버지 방에 들어가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아버지가 평소에 쓰시던 모자를 들고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부터 이 모자는 내가 쓰겠다." 그러고는 아주 단호한 표정으로 모자를 쓰고 사립 밖으로 걸어 나가시는 것이었다.
-이시영 시, 「아버지의 모자」 전문
애도의 방식으로써 영화 '사랑하는 당신에게'는 아내가 하던 일을 이어 하는 남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시영의 시 '아버지의 모자'는 고인의 평소 착용하던 모자를 그를 사랑하던 오촌당숙이 "오늘부터 이 모자는 내가 쓰겠다"며 사립 밖으로 걸어 나갔다는 이야기이다. 사랑하던 이와의 이별은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기에 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무언가와 연결되기를 바라는 모양이다. 그것은 애도의 방식이기도 하거니와 기억의 방식이기도 하다.
김영화 작가의 '그 겨울로부터'는 애도와 기억의 예술로서 숙연함을 느끼게 전시회였다. 자크 데리다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로 타자와 연결되는 행위로서 애도를 강조한 바 있다. 나와 타자의 연결 또는 연대로서 최고의 방식이 애도라는 것이다. 사라진 것을 같은 물질의 형태로서 되돌릴 수는 없으나 의식 속에서는 만날 수 있는 법, 그 형상을 은유하는 방식은 할망당에 걸려 있는 물색이거나 영화 '사랑하는 당신에게'의 제르먕이 보여준 춤이거나 김영화의 그림 같은 것이 아닐는지. 시월은 기도의 달이었으면 좋겠다. 릴케의 시처럼 집 없는 사람과 홀로 있는 사람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누군가의 기도가 간절하다. 기도로써 시도 적격이지 않을까 싶다. 시 읽는 계절, 시월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