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오름, 연못이 하나의 빛깔로 물들여진 11월의 초순이다. 석탑에 돌 하나를 얹듯이 조심스럽게 시작해보는 하루, 모든 것이 새초롬하다. 천천히 걸으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꽉 찬 일정에 마음이 조급하다. 그래도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물 한 모금 마실 여유는 필요하다 싶다. 

제주의 오름 중에 가장 예쁜 이름을 가진 오름을 고르라 하면 '바농오름'이라 말하고 싶다. 바농이라는 제주어는 '바늘'을 뜻한다. 어렸을 때 동네 어른들은 바농오름에 갇히면 "조(아래아)물도록 집 찾(아래아)아오지 못헌다"고 하였다. 소를 찾으러 간 이웃집 친구 아버지는 다음날이 되어야 돌아왔다. 할머니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는데, 바농오름에 갇혀 집을 찾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만큼 오름 주변으로 사방이 가시덤불로 싸여 험하다는 뜻이다. 지금이야 산책로로 인기가 많다. 약간 경사가 있어 오르는데 힘겨움이 있지만 그 옛날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가끔 길을 잃고 눈만 뻐끔뻐끔했을 그 삼촌 얼굴이 떠오른다.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을 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 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둥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김기택 시 「소」 전문)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는 시행에 풀썩 주저앉았던 기억이 있다. '말을 가둔 둥그런 눈이 얼어버리면 어떡하지' 하며 걱정스럽기도 했다. 그건 죽음이지 싶으면서도 눈(目)이 얼어버리기 전에 말이 풀리는 해빙의 순간이 와야 곱게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은 그 누군가들이 우르르 스쳐 지나간다. 지난 10월 29일은 이태원 참사 2주기였다. 159명의 참사 책임을 지고 그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는 몇 건의 뉴스보도만 있었다. 그리곤 몇 시간 만에 사라졌다. 그렇게 스쳐 보낼 것들이 아닌데 금세 눈처럼 흩어진다. 오랜 침묵의 무게는 감당할 길이 막막해진다. 

한편, 눈(雪)처럼 눈이 맑아서 저절로 미소가 번지는 그런 침묵도 있다. 이를 테면 봉쇄 수도원에서의 일상이 그렇다. 잠에서 깨어 하는 일은 묵상하고, 기도하고, 밥하고, 나무를 베고, 또 기도하고…. 가을 운동회를 하며 깔깔거리며 웃는 수녀들의 모습은 의외이면서 유쾌하다. 공을 맞은 수녀가 "너무 한다"고 화를 내는 모습은 귀엽기까지 하다. 

다큐멘터리 영화 '기도의 숨결'은 프랑스 쥬크에서 평생을 서약한 성베네딕도회 수녀들의 일상을 담은 기록이다. 성 베네딕도의 가르침에 따라 기도와 노동하는 수녀들의 삶을 그렸다. 영화의 촬영지는 남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 부근의 뒤랑스 계곡을 내려다보는 수도원인 '노트르담 드 라 피델리테'라고 한다. 이곳은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의 배경이기도 한 곳이다. 

영화에서 수녀들은 모든 이의 일상과 비슷한 모습을 보여준다. 주방에서 생선을 손질하며 식사준비를 한다. 그리고 다양한 시간과 공간에서 독서와 기도가 이어진다.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경건한 제의 같다. 엄숙하고, 해맑고, 담백하고, 차갑고, 따뜻하다. 

영화에서 흥미로웠던 장면은 수녀들의 식사 중에 프란체스코 교황의 설교가 낭독되는 장면이다. 중동에서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에 의해 중근동 기독교인들이 수난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자신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그 무엇보다도 몸의 고통이 가장 무섭다는 솔직한 고백이 참 인간답다는 생각을 했다.

시시로 버림받고/시시로 잊혀지는/당신의 목쉰 소리는/이승과 저승을 잇는/바람 같은 기도가 되어/내가 믿지 않은/사랑하지 않은/잃어버린 시간들을/울게 하고 있습니다 (이해인 시 「가신 이에게」 부분)

얼마 전에 이해인 수녀의 수도생활 60주년 기념 '가을편지 콘서트' 소식이 들렸다. 이해인 수녀는 1964년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시인으로서 그가 남긴 참회의 시는 모든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안식의 기도가 되길 바란다. 기도가 딱 어울리는 11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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