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제주도 15. 먹돌
욕에 나오는 ᄆᆞᆼ근년, ᄆᆞᆼ근놈
불의 색 ᄌᆞᆫ작지와 훍은작지
곁에 있어 모르는 아름다움
아름다움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운 것과 늘 같이 사는 사람들은 자기 얼굴을 자기가 스스로 볼 수 없는 것처럼 그 대상의 아름다움을 잘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누구나 자신의 경험이 고유한데 우리는 그것을 우습게 아는 경향이 있다. 미를 보는 눈은 안목이 필요하며 안목을 키우려면 미적 경험이 필요하다. 사람마다 경험은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자기의 인생은 곧 자기의 다양한 경험으로 완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우리는 아비투스(Habit us)라고 부른다.
△알 작지, 둥글어서 귀여운
알작지는 알+작지가 결합한 말이다. 알=새 알(卵)과 같다는 의미와 작지=자갈이라는 제주어가 합성된 단어이다. 여기에서 알작지는 '알처럼 생긴 둥그스름한 자갈을 말한다. 알작지는 일명 먹돌이다. 육지에서는 이런 돌들을 몽돌이라고 부른다. 먹돌은 원래 암편의 모서리가 오랜 세월 풍화 때문에 마모돼 미끄닥하면서도 무거우며, 색깔은 짙은 회색이나 검회색, 붉으스름하거나 푸르스름한 색 등 화산암의 기본 색상에 따라 다양한 먹돌이 된다. 알작지 해변의 먹돌은 크기도 매우 다양한 둥근 자갈이다. 자갈은 크기에 따라 미끄러운 바위(bouider), 큰자갈(왕자갈:gravel-cobble), 잔자갈(조약돌:pebble), 왕모래(granule)로 불리며, 이 자갈들은 모래와 함께 섞여 있는 하천이나 해안의 퇴적물이다. 토착어로 큰자갈은 훍은작지, 조약돌은 ᄌᆞᆫ자갈, 모래는 모살, 작은 돌부스러기는 머흘이라고 한다. 왕자갈은 주먹만한 돌로, 자연스럽게 둥근 돌멩이를 말하며, 크기는 대개 64~256mm이다. 길을 포장하는 골재라는 뜻의 cobblestone이란 말이었으나, 17세기 이후 단축된 말인 cobble로 사용되었다.
제주시 내도동에서는 먹돌이 많은 해변을 '알작지'라고 불렀다. 알작지가 명사이면서 고유명사로써 사용되기도 한다. 알작지 해변은 썰물 때가 되면 둥근 자갈들이 '서로 말ᄀᆞ름직이(대화를 하듯이)' 둥글둥글 오종종 모여있는 모습이 너무나 정겨우며, 자극적인 도시 풍경에 시선이 길들여진 우리의 눈을 안도감으로 이끌어준다. 밀물 때가 되면 알작지들은 서로 조금씩 생물이 살아 움직이듯 자글락 거리면서 꼬물되며 새로운 하모니를 만들어낸다. 물결이 밀려오면서 먹돌들을 깨우고 나면 알작지 해안에서 들려오는 신기한 자연의 소리는 마치 무기물에도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만물은 서로에게 유익하고, 사물은 서로가 다른 사물을 돕는 일을 한다. 혼돈으로 보이는 것도 조화를 위한 과정일 뿐이고, 조화 또한 언젠가는 새로운 혼돈의 중심에서 다시 시작하는 세계가 될 것이다. 세계와 나는 결코 정적(靜的)일 수가 없으며 늘 변화를 통해서만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다. 움직임 속에 정지(停止)가 있고, 정지 속에 움직임이 있다. 지구는 수권(물), 대기권(공기), 지권(땅), 생물권(생명)으로 서로가 연결돼 있으며, 이런 하나의 지구도 다시 우주와 하나로 연결된 것이다.
알작지의 하모니는 돌과 물결이 만들어내는 자연의 음악이다. 이런 알작지 해변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내도동이 지형상 도근천 하류와 바다가 만나면서 한라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주변 퇴적물을 하류까지 실어와 바다가 다시 조수간만의 흐름과 파랑 에너지로 돌을 이리저리 굴려서 원마(圓磨)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장소에는 역빈이 발달하는데 그 역빈을 구성하는 퇴적물은 하천을 통해 육상으로부터 공급된다. 사실상 해양에서 실어 오는 자갈보다 육상의 암편이 하천으로부터 공급되는 비율이 90% 정도로 훨씬 높다.
최근 내도동의 도로 개발과 주거지 변화로 인해 알작지 해변의 규모가 훨씬 줄어들었고, 주변 먹돌 밭담과 먹돌 축담, 먹돌 우잣담들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어 원래 고유한 내도동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있다. 새로운 도로를 개설하면서 낮은 지대의 먹돌 축담들이 매립되었고 오랜 세월의 흔적을 남겼던 먹돌 유산이 무너지면서 해체돼 지금은 마을 내 집담이나 마을 가까운 곳의 먹돌 밭담을 제외하고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자연에서 얻은 아름다움은 사람의 손이 닿을수록 변형되고 도시화가 진행되는 동안 새로운 소재로 바뀌면서 자연소재가 점점 인공 소재로 바뀐다. 우리가 자연의 소재가 귀한 것이라고 깨닫는 날이 오기나 할까.
△먹돌로 단 울타리, 우잣담
먹돌은 하천이나 바닷가에서 둥그렇게 마모된 자갈을 말하며, 우잣담은 울타리담을 말한다. 잣은 성(城)을 말하는 중세어이다. 간혹 울담이라고도 부른다.
내도동은 한라산 북서부 지역에 있는 바닷가 마을이다. 그곳의 특징이 있다면, 먹돌이 운치를 더해주는 동네라는 사실이다. 먹돌이란 제주사람들이 몽글아진 돌을 부르는 말이다. 제주어에 '몽글다'라는 동사가 있는데 "어떤 사물이 많이 사용하여 닳고 닳은 상태"를 말한다. '몽근'이라는 표현은 대상마다 다르게 적용되는데 돌인 경우 자연 상태에서 이리저리 둥글려서 마모된 모양을 '몽근돌'이라 하고, 붓인 경우, 붓 끝이 거의 닳아서 둥그렇게 남은 상태를 몽근붓이고 하며, 사람인 경우에 예의를 모르고 막 돼먹은 행실을 보고 '몽근년, 몽근놈'이라고 욕하는 말로 사용한다. 다시 말해 몽근놈, 몽근년은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면서 세상을 험하게 살아서 산전수전 겪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먹돌도 하천의 물의 유속과 파도에 의해서 그런 상태를 겪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둥그스름한 돌을 몽글어진 돌이라고 한다. 이런 돌을 먹돌이라고 하는데, 먹돌은 단단하고 매끈한 돌멩이로 물에 젖으면 윤기가 나서 짙으면서 어두운색으로 변한다. 먹돌이란 육지에서는 몽돌이라고 부른다. 이런 돌들은 원마(圓磨:rounding) 현상으로 만들어지는데 쪼개진 암편(岩片)이 하천에서 운반될 때 물살에 구르며 부딪치거나 해안가에서 파도에 휩쓸려 마모되면서 점차 둥근 자갈이 된다. 제주시 병문천과 산지천 사이의 해안인 탑동이 매립 전에는 새까만 먹돌로 유명하여 수석 애호가들이 반질반질하고, 아주 검고 매끄러운 석질 때문에 일명 '묵석(墨石)'이라고 하여 국내 최고의 수석으로 여겼다.
우리나라에서 돌의 고장하면 누구나 꺼리낌없이 제주도라고 말한다. 그만큼 제주도는 가는 곳마다 "돌로 뱅뱅 돌아진 섬"이기 때문에 제주 사람들은 한평생 돌과 씨름을 했다.
돌은 하나의 개체로는 담돌이라고 하고, 이 담돌로 벽을 만들면 비로소 돌담이 된다. 담돌과 돌담이 모두 원래의 용암이니 하나에서 분리되었다가 다시 하나로 합체하는 모양새다. 현상은 달라도 본질은 같을 수가 있다. 현상에서 용암과 돌담이 모양은 다르지만 현무암이라는 것의 본질은 같은 것이다. 용암은 자연적 덩어리이고, 돌담은 사회적 덩어리지만 근원으로 돌아가면 역시나 용암 덩어리로 만나게 된다.
담돌은 자연적인 의미가 있지만 돌담에는 사회적 의미가 있다. 울타리를 둘러 가옥을 보호하고 그 가옥과 연관 있는 삶의 여러 가지 요소들을 규정하게 된다. 그래서 남의 돌담을 넘는 것을 '담질'이라고 하여 금기하므로 입구에 해당하는 '도(梁)'를 만들었다. '올레'나 '밭도'가 이것이다.
돌담의 재료인 담돌은 빌레에서 나온다. 빌레는 땅속에 묻힌 생돌을 말하는 암반이 되고, 밖으로 노출되는 것은 코지(岬)나 바위, 여(礖), 석산(石山), 비크레기(돌 비탈), 얼크레기(돌들이 엉킨 곳), 엉덕(바위 기슭)이 되는데 이것들은 일종의 투물러스(tumulus:용암 외피에 내부 가스 압력으로 부풀어 생긴 작은 언덕)가 된다. 담돌들은 화산쇄설물들이 풍화로 부서지거나 해체되어 놓인 다양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마을의 집들은 모두 돌담을 쌓았는데 이웃 간 울타리를 구분한 것이다. 내도동의 먹돌은 매우 귀한 담돌이다. 제주도 몇 안 되는 하천 지역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서만 볼 수 있기 때문에 유독 이 돌로 돌담을 쌓은 곳으로는 가장 대규모라고 할 수 있다. 이 먹돌은 타원형이나 원반, 알과 같은 원형(圓形)이기 때문에 외담 돌담을 쌓기 어려워 돌담을 2~3중으로 받치거나, 담돌과 담돌 사이 작은 틈에 잔돌을 끼워야 하며, 일반 돌담보다 둥글어서 높이 쌓기 힘들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아무리 혹독한 현실이라도 살아내야만 해서 먹돌 외담을 쌓기 힘들면 겹담으로라도 쌓아 거센 바닷바람을 버틴 것이다. 집이나 쉐막(외양간)의 축담일 때는 안으로 진흙을 발라서 바람을 막았다.
내도동 먹돌은 수천수만 년의 자연적 작용으로 만들어진 결과이며, 우리 생의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귀하디귀한 돌이다. 천장지구(天長地久)라고 했던가. 인간은 유한한 존재라서 슬프지만, 자연은 영원한 존재라서 그렇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