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제주도 16. 정복의 동굴
원님보다 대단치 않는가
입을 것 없을 때 옷 주는 예펜
임금님보다 대단치 않는가
△종교의 문턱 애니미즘
인류학자 타일러(Tylor)는 애니미즘(animism)이란 종교로 넘어가기 직전의 단계(liminality)로, 흔히 문턱(threshold)이라고 했다. 애니미즘은 정령(spirit)에 대한 믿음이며, 자연 모든 것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현상이다. 애니미즘은 바위·나무·동굴·물·달·태양 등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 생명이 있다고 믿는다. 인류 초기의 등장한 신앙 형태이며, 범신론적인 세계괸을 형성하면서 우리의 샤머니즘과 연결된다.
무속은 지금은 문화적 현상으로 받아들이면서 과거 탄압받았던 무당들이 인간문화재가 됐다. 반면 민족 문화의 끄트머리에 있는 잔여문화로써 숭고함은 살아지고 무대화된 세속성만 연희로 남았다. 모든 일의 시작은 좋으나 오래될수록 권력화되고 욕망이 끼어들면서 변질된다.
1702년 3월 이형상은 제주목사 겸 제주진병마수군절제사(濟州牧使兼濟州鎭兵馬水軍節制使)로 부임했다. 그의 나이 50이 다된 때였다. 그는 유교 원리주의자면서 개혁 성향이 짙은 인물로, 제주 목사로 부임하자마자 역대 목사보다도 더 "제주 3읍(邑) 백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현실의 상태에 눈을 감으면 편할 것이지만, 천성이 불의를 보면 외면하지 못하는 성격이어서 묵과하지 않았다. 당시 제주민들은 가난하고 어려운 생활 속에서 과중한 부역(賦役) 때문에 특히 잠녀(해녀)와 포작인 부부는 중과세로 시달리고, 테우리, 답한(沓漢), 곁꾼 등은 자신에게 부과된 세금에 겨워 스스로 노비가 되거나 동생이나 처자를 팔았고, 또 부모를 판사람도 58명이나 돼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원인은 국가였다. 이형상은 국가가 나서서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해, 당장 상평창(常平倉)의 곡식으로 진상물(進上物)을 구입해 관에 바치게 하는 제도 개선을 바랐다.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 왕조시대의 한계라고나 할까. 도덕에 어긋나는 극단적인 상황을 바로잡아야만 했다.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며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의 현실에 있다. 문명이 달라지고,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삶의 원리가 작동되는 현실은 크게 다르지가 않다. 오늘날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옷을 입고 있으나 언제라도 그것에서 눈을 떼는 순간 단 한 번에 위태로워질 수 있다.
세상은 모든 것이 이해관계의 산물이다. 뺏은 것은 언젠가 빼앗기고, 손에 들어온 것을 지키려는 것의 인간의 본능이다. 생존은 인간 존재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이형상이 보기에 외딴 섬에서 막무가내로 일어나는 기가막힌 것은 무격(巫覡)들의 행패였는데 이들 '당한(堂漢)'들의 횡포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행되고 있었다. 무격의 숫자도 무려 1,000명을 넘었다. 이들은 신당에서 소를 잡아먹기도 하고, 마을의 공동 재산인 면포나 비단을 빼앗아가고, 급기야 재물을 위해서 사람들을 결박하고 약탈하기도 했다. 이들이 빼앗은 마소의 수가 100필에 가까웠고, 또 논밭을 뻬앗으면 저희끼리 나누어 갖는 등 신을 팔면서 혹세무민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당시 이형상의 눈에는 음사(陰祀)의 폐해가 가장 심각해 그대로 두고 볼수가 없었다. 음사는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미신에 불과했다.
△김녕굴을 수색하는 군사들
이형상의 결정은 단호했다. 본격적인 불교·무속 철폐는 빠르게 진행됐는데 순력기간에 시행됐다. 미국의 지리학자 데이비드 네메스(David Nemeth)의 관찰은 매우 흥미진진하다. 그는 대규모로 진행된 제주섬의 신앙 파괴를 '수색과 파괴'라는 주제로 접근했다. 한 세계의 파괴는 다시 한 세계를 건설하는 일일 것이다. 그 '수색과 파괴'는 성리학의 밀알이 되기 위한 행위라는 것을 네메스는 보았다. 그의 긴장감 있는 문장은 이러 했다. "조선 정부는 이형상이라고 불리는 목사를 섬에 파견했다. 섬의 모든 이교도적인 불교사찰과 무속의 거점인 신당을 파괴하기 위해 상당한 군사력도 동원했다. 즉시 극적이면서도 체계적인 '수색과 파괴' 정책을 펼쳐졌다. 그는 자신의 모든 공적인 업적을 문자와 그림으로 작성해 역사 기록에 남길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러기 위해 화공도 동행했다."
이형상 목사가 대동했던 지방화공 김남길의 「탐라순력도」 가운데 「김녕관굴(金寧官窟)」은 신당을 수색하는 장면이다. 그림의 굴은 모두 세 개인데 제1굴 안에 이형상은 8명이 매고 있는 가마를 타고 있으며, 그 뒤로 5명의 군관들이 따르고 있다. 가마 앞에는 여인 두 명이 각각 구덕을 등에 지고 있으며 그 가운데 한 여인이 군관의 물음에 답을 하고 있다. 두 여인은 바짝 긴장하면서 위축된 모습이다. 여인들 앞으로 5명의 군사들이 다음 명령을 기다리는 것처럼 대기하고 있다. 같은 굴 안 다른 공간에서는 다섯 명으로 구성된 한 팀의 군사들이 환한 횃불을 들고 어두운 공간을 샅샅이 살피고 있다. 계속 굴 안은 긴장감이 돌고 길라잡이가 된 두 여인은 안쪽으로 더 들어가고 있었다.
한편 다른 굴에서도 상황을 마찬가지로 일어나고 있었다. 제2굴에서는 한 명의 군관 지휘아래 횃불을 든 2명의 군사가 굴 안을 살피고 있고, 굴 밖에서는 2명의 여인과 그 뒤에 칼 찬 무사들이 5명이 포위하고 있다. 두 여인도 역시 군관의 질문에 대답하는 듯 무언가에 대해 말을 하고 있다. 만약에 단순한 유람처럼 굴을 관광하는 것이라면, 이렇게 두 팀으로 나누어 1, 2굴을 동시에 살피지는 않을 것이다. 여인 두 명씩 대동하고 각각의 굴을 살피는 것은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가장 무속이 성행했던 김녕마을은 뱀을 모시는 동네였던 만큼, 김녕굴이 뱀굴이고 서린 판관이 대사(大蛇) 퇴치를 했다는 것을 이형상은 모를 리가 없었다. 김녕관굴은 데이비드 네메스의 지적대로, 이형상은 가부장제를 대표해, 도도하고 자립적인 제주 여성의 자존을 구겨버리려고 '정복의 동굴'을 차지했다. 이유는 순력 중 일부러 이교도 신당을 파괴를 벌인 수색 행차였던 것이다.
이형상 목사의 신당 파괴 이후 제주의 당들은 모두 깊고 으슥한 곳으로 숨어 버리고 말았지만, 비 개인 뒤 생명이 땅 속에서 스멀스멀 나오듯 곳곳에 돌 무지 당이라도 만들어 여성의 독자적인 세계를 다시 세웠다. 마침내 이형상이 가고 나니 여성들은 안내(안칠성)의 공간을 차지했다. 조선의 중앙집권은 겉으로는 완성된 듯 모였지만 세계관은 더욱 확실하게 분리됐다. 남성들은 마을 포제를 해 하늘에 감사하고 여성들은 용왕 제사와 본향당제로 자신의 신들을 섬겼다. 무관한듯 무관하지 않는 서로 협력하는 공동체가 됐다.
△이날을 기념하라
제주도민 700명이 건입포에 모여 북쪽을 향해 임금께 절을 올렸고, 향품문무관 300여 명은 관덕정에서 이형상 목사에게 큰 절을 올렸다. 사찰 5곳과 신당 129곳이 파괴했고, 남자 무격과 여자 무당 285명을 귀농시킨 축했다. 김남길은 당시의 훼철된 장면을 「건포배은(巾布拜恩)」이라는 그림으로 남겼다. 1702년(숙종 28) 11월 20일의 일이다. 그림은 우울했다.
「건포배은(巾布拜恩)」은 마치 전쟁 후의 그림과 같이 괴기스러울 정도다. 불타는 한라산 아래 신당과 사찰들은 비극적으로 침울한 분위기에서 지옥처럼 불타오르고, 제주목성은 일을 성취한 기쁨의 기운으로 가득하다. 해안가에서는 장엄한 의례로 임금을 향해 그 날을 축하하고 있다. 삶과 죽음이 대비되고 슬픔과 기쁨이 오버랩 된다. 어머니산 한라산이 슬픔에 잠기고, 육지로 향하는 유림들의 환호는 수평선을 넘지 못하고 공허한 메이리가 됐다.
마치 한라산에서 들려오는 노래처럼 제주목관아를 넘어 건입포에 엎드린 남성들의 등뒤에서 울려퍼진다. "담고망을 버룽버룽~, 나의 몸은 너덜너덜~"
그렇다면 이형상의 신당 파괴 후 달라진 것은 무엇이었나. 여전히 여성들은 바다로 나갔고, 미역과 전복의 세금을 위해서는 만물의 고마움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생업을 없애지 않는 한, 신당을 파괴해서 무속이 타파될 일은 아니었다. 바다에 의지한 삶은 공포와 더불어 행복도 같이 있었다. 생활의 끝은 언제나 생존이었고, 생존의 목숨줄은 바다로부터 나왔다. 여성들은 남성들을 더 믿을 것도 없었다. 상황에 따라 여정으로 살았고, 두불채(후처)라도 살 수 있었으며, 수틀리면 혼자만 살기도 했다. 남성들은 언제라도 체제의 희생양 될 수 있기 때문에 여성 스스로 살아가는 것을 배워야 했다. 그것의 비밀은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자립적인 삶을 만드는 것이었다. 삶은 언제나 이념보다 질기다. 이념은 한 순간에 생존 앞에 쉽게 무너지기 일쑤지만, 생산력은 이념을 바꿔버리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