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제주도 18. 감자 <1>

만물이 인간을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다른 모든 사물도 무언가 다른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마이모니데스)

△감자 껍질을 벗기는 가난한 여인 

처지가 어려워 본 사람이 상대방의 처지를 따뜻하게 이해할 수 있다. 수많은 제주 유배인이 그랬듯 자신이 잘 나갈 때 더구나 죄인이 되기 전에, 당당하고 자만하기까지 하던 자신이 하루아침에 추락하리라고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다. 살다 보면 처지가 바뀔 수 있다. 먼저 상대방이 돼 깊이 생각해 보라.

빈센트 반 고흐는 1985년 네덜란드의 가난한 소작농 사람들을 즐겨 그렸다. 흰 수건을 쓴 여인, 어두운 수건을 쓴 여인, 바구니를 짜는 농부, 물레를 돌리는 농부 여인, 한 끼 식사하는 네 명의 농부, 감자 깎는 여인 등 가난한 농민들을 그린 그림들은 그야말로 어둡고 칙칙하다. 그러나 이 소작농을 그린 그림들은 고흐의 대표작 '감자 먹는 사람들'을 위한 전주곡에 해당한다. 4개월 가량의 미술 수업이 전부였던 고흐는 처음 기술이 부족하여 환영주의적인 묘사보다는 감정의 표현을 선호하게 되었다. '감자 먹는 사람들'은 서툰 듯하면서도 매우 강한 인상을 주는 작품으로 내면 깊숙하게 숨어있는 고흐의 감정을 한 순간에 내뱉는 듯하다. 램프 아래서 모인 가족들의 식사였던 감자는 가난한 사람들의 주식이었는데 그들의 식사에서 처연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그 무렵 아일랜드는 유럽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았는데 당시 아일랜드 인구 95%가 농민이으로, 섬의 토양에서 재배한 것은 오로지 감자밖에 없었고, 기후 조건으로 식량의 위기에 내몰리게 되었다. 1845년 유일했던 감자가 부패 곰팡이의 표적이 되면서 역사상 최악의 아일랜드 대기근이 시작되었다. 감자 잎마름병(blight)으로 식량이 부족하게 되자 대기근 동안 굶주림에 의해서 100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100만명이 이민을 떠났다. 

△감자의 기원

감자(Potato)는 한자로는 마령서(馬鈴薯)이며, 학명은 Solanum tuberosum L.이다. 밭에서 재배되는 재배종과 야생 상태에서 자라는 야생종이 있다. 감자는 가짓과(Solamaceae)에 속하는 다년 초본이며, 초장은 약 50cm이고, 여름철에 줄기에는 흰색이나 엷은 자색(紫色)의 꽃이 핀다. 식물학적으로는 토마토, 담배, 고추, 가지 등과 같은 가짓과 가지속 식물이다. 가지속 식물은 1500종에 이른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약 150종이 덩이줄기 식물을 이루는 소위 감자의 일종이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야생종으로 재배종은 7종뿐이고, 이 재배종 7종 가운데 1종만이 세계적으로 널리 재배되고, 나머지 재배종들은 안데스 고지대에서 분포해 자라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먼저 재배화된 감자는 2배체로 학명은 솔라넘 스테노트넘(Solanum Srenotomum)이다(山本紀夫, 2019). 감자는 2배체인데 염색체 수가 12개로, 2배체인 24개의 염색체를 가졌다. 야생종에서 2n=12, 2n=24, 2n=36, 2n=48, 2n=60, 2n=72 등이 발견된다(吳現道, 1996). 그 후 이 스테노트넘종에서 다양한 환경에 적응한 여러 개의 재배종이 탄생했다.

감자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중요한 식량 작물로 사람들이 즐겨 먹고 있지만 여러 해충에 취약해서 가끔 심각한 기근을 일으키기도 했다. 감자를 죽이는 병원체나 그것을 먹어 치우는 곤충들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농약이 발명됐다고 한다. 

감자는 잉카에서 기원전 3700~3000년 사이에 재배하기 시작했고, 그 종류도 무려 3천 개가 넘었다. 잉카인들은 냉동 건조법으로 감자를 보관했는데 고지대의 사막 기온이 낮과 밤의 온도 차를 이용하여 만든 '추뇨'라는 냉동 건조 감자는 기근에 대비하여 거대한 창고에 다량으로 보관하고는 물도 같이 저장하였다. 

감자는 1570년 스페인 탐험가들이 잉카 제국에서 스페인으로 전해졌고, 유럽에서 북아메리카로 건너가 플로리다로 전해졌는데 그곳의 식민주의자들에 의해서 버지니아까지 이동했다. 또 북아메리카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다시 유럽으로 돌아갔다.

1586년 월터 롤리(Walter Raleigh) 경의 동료인 토머스 해리엇 경이 감자를 처음 영국으로 가져갔다. 또한 1586년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향수병에 걸린 아메리카 정착민을 데리고 돌아오면서 버지니아산 감자를 들여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몇 년 후에 스위스의 저명한 식물학자 카스파르 바우힌(Caspar Bauhin)이 감자에 솔라눔 투베로숨(Solanum tuberosum)이라는 학명을 붙였다. 솔라눔(solanum)은 "완화시키다", "진정시키다"라는 라틴어에서 유래되었지만 덩이줄기의 의미와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처음에는 감자를 '악마의 음식'이라고 하여 대부분 사람들이 감자를 먹으려고 하지 않아서 식용이 아닌 사료로 재배했다거 한다. 19세기 이전에 감자를 주식으로 삼은 곳은 아일랜드와  발칸반도의 일부뿐이었고, 사람들은 작은 땅에서도 생산량이 많이 나오는 감자의 장점을 익히 알았지만 다른 작물이 흉작일 때만 감자를 먹을 뿐이었다. 

1619년 프랑스의 부르고뉴에서는 "감자를 많이 먹으면 한센병에 걸린다"는 소문이 퍼져서 그곳의 영주가 감자를 먹지 말라는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오늘날은 가장 많은 감자를 소비하는 미국에서도 1720년까지도 감자가 수명을 단축할 뿐만 아니라 한센병과 매독의 원인이라고 생각해서 먹지 않았다.  

프랑스에서는 감자를 먹기 위한 기발한 시도가 있었다. 새로운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생산하는 가술을 개발하고, 천연두 백신 보급에 힘을 쏟은 인물인 프랑스 육군 제약사 앙투안 오귀스탱 파르망티에가 전면에 나섰다. 그가 감자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노력을 쏟기 전까지는 프랑스에서도 감자 재배가 금지돼 있었다. 이미 파르망티에는 감자를 먹어 본 적이 있었는데 그가 독일과의 7년 전쟁 동안 독일군 포로 생활을 하던 중 감자를 먹었고, 그때 감자가 훌륭한 미래의 식량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1772년 파리 의과대학을 설득해서 감자를 먹어도 된다고 선언하도록 했다.

그렇지만 한 번 굳어진 대중들의 인식을 바꾸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파르망티에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꾀를 내어 루이 16세의 병사들이 자신의 감자밭을 지키기 위해 경비를 서도록 함으로써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시켰다. 의도적으로 파르망티에는 경비병들에게 감자를 원하는 사람들에게서 뇌물을 받도록 눈감아 주었고, 밤에는 사람들이 감자를 훔쳐갈 수 있도록 슬며시 경비병들을 철수시켰다. 사람들의  호기심이 더해갈수록 그 감정들을 부채질하기 위해서 파르망티에는 자신의 밭에서 캔 감자로 잔치를 벌였다. 당시의 유명한 인사였던 벤저민 프랭클린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초청해서 감자를 맘대로 먹어도 된다고 설득했다. 

급기야 루이 16세는 황제복의 단춧구멍에 감자꽃으로 만든 장식을 꽂았고, 대중들에게 덩이줄기를 받아들여서 대규모로 재배하도록 명령했다. 1813년 프랑스에서 재배중이던 100종이 넘는 감자 종자를 프랑스 농협중앙회에서 수집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프랑스에서 감자는 금기의 음식에서 "땅의 사과"로 알려졌다(A. 폰 하펠, 2022).
 

△하늘 봬린 지슬, 감자의 독성 

감자는 생산성이 매우 작물로 토양의 조건이 나빠도 잘 자라는 식물이다. 그러나 독성이 있어서 생명에 치명적일 수가 있었다. 감자 중독 사고는 자주 발생하는데 식물 가운데 버섯 다음으로 위험한 독소가 있었다. 감자에 중독 증상을 일으키는 물질인 솔라닌과 차코닌이라 하는 알칼로이드 배당체가 있다. 이들 알칼로이드 배당체는 새싹, 햇볕에 노출된 감자 알맹이에 변색된 초록 부분에서 생성된다.

제주에서는 녹색으로 변색된 감자를 일러 "하늘 봬린 지슬"이라고 한다. 맛은 매우 떫으며 먹을 때는 그 부분을 깊숙히 도려내야 한다. 땅 속에서 밖으로 노출되거나 수확한 후에 햇빛이나 자외선에 노출되면 알칼로드가 합성될 수 있고 솔라닌이 몇 배 이상 높아진다고 한다. 인체에 아세틸콜린이 축적되면 부교감 신경을 자극해 용혈, 운동중추마비, 국소자극 따위의 증상을 일으킨다고 한다(김원학, 임경수, 손창완,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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