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제주도 21. 고구마 <2> 

△고구마 제주 전파 재배 

또 다른 고구마 제주 유입설로 석주명은 John W. King의 China pilot(중국 파일럿). 3rd. 에sweet potato(고구마)가 1861년 제주도 산물이라고 기록돼 있다고 했다. 1940년대의 고구마 품종으로는 원기가 제일이라고 한다(석주명, 1968). 고구마가 제주에 본격적으로 재배 전파된 시기의 다른 견해로는 김태능의 설이 있다. 그는 고구마가 고종 21~22년(1884년경)가 도입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고종 20년(1883) 일본인어채범죄조규가 성립된 이래 일본 어민들 가운데 나가사키현 어민들이 어기를 따라 제주 연해에서 고기잡이하러 왔는데 이들은 우도와 성산포 등지에 일시 정박했고, 잠수기 어업에 종사하는 무리들은 가파도에 살면서 해산물을 잡았다. 이들이 고구마를 주식이나 부식으로 가져왔는데 이곳 주민들은 고구마 종자를 얻어 재배법을 배워서 심기 시작했는데, 이로써 제주 내에서의 우도와 가파도가 제일 먼저 고구마를 심은 곳이라고 했다(김태능, 1982). 

일제강점기가 되면 고구마는 빠르게 장려되고 있었다. 고구마는 이르면 4월초~4월 15일까지 씨고구마를 심고, 줄기가 자라서 심는 시기는 6월 10일에서 6월말까지 이랑을 내고 그 위에 심는다. 1913년 고구마 생산량은 약 600정보의 면적에 185만143관이었다가 10년이 지난 1923년에는 4156정보에 1059만4200관이었다. 1938년이 되면 고구마 면적도 거의 두 배 가까이 늘어나 재배 면적이 7357정보가 됐고, 생산량도 2348만관으로 급상승했다. 중일전쟁의 여파와 일본 군국주의가 확대와도 무관하지가 않다. 1938년에는 알코올 제조를 위해 제주 동부두에 무수주정공장 설립계획이 입안됐다.

△중일전쟁의 확산 

1937년 일본 군부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군국주의가 급속도로 확산됐다. 이때 중국 우거우차오 사건을 계기로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개전 초기에 전선이 화남과 화중지방으로 확대되면서 일본군은 여러 도시를 점령했으나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국공합작으로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졌지만, 일본은 만주에서 군대를 철수하지 않았다. 이에 일본은 영국, 미국 등 국제사회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게 되자 유엔을 탈퇴하면서 국제적인 고립을 자초하고 있었다. 1938년에 들어서면서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 무솔리니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이즈음 미국과 영국도 중국을 원조하기 시작하면서 일본을 불안케 했다. 당시 미국의 군수물자에 의존했던 일본군은 전쟁 수행에 차질이 생기면서 대동아 공영권을 건설한다는 이유를 들어 남방정책을 추진하고 식민지 수탈에 박차를 가했다. 1940년 9월 일본은 독일과 이탈리아와 3국 동맹을 맺었고, 유럽 파시스트의 대열에 가세하면서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마침내 미국을 상대로 진주만에 있는 해군기지를 선제공격하면서 태양양 전쟁을 일으켰다. 

중일전쟁이 일어나기 전 1930년대까지만 해도 제주도의 공장은 한림의 통조림 공장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일전쟁의 확산으로 파시스트 전쟁광들의 야욕이 일어나고면 있었다. 1940년이 되면 제주시에 알코올 공장이 착공됐다. 알코올을 생산하기 위해서 무수주정공장을 세운 것은 전쟁 수행을 위한 전시체제의 생산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구마, 전쟁기의 알코올 재료       

일제는 이미 1938년 8월 무수주정공장을 계획하고 제주도 동부두 축항공사를 시작했으며, 부두가 완공한 후 알코올 공장을 짓기로 계획한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총독부는 120만원의 사업비를 들여 3차의 계획에 따라 동부두 일대에 1만3594평을 매립해 항만 공사를 착수했다. 무수주정공장의 설립계획은 제주도에서 대량으로 재배되고 있는 고구마를 이용하여 전시상황에 필요한 알코올을 생산한 후 항만을 통해 원활하게 일본과 대륙으로 실어 나르려는 목적이 있었다. 이로써 일제 식민지 총독부 지휘 아래 설립된 친일 매국 기업들의 기간산업이 전쟁 수행을 위한 물자의 약탈 수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40년 5월에 동양척식회사 제주항 동부두 남쪽 부근의 대지 1만3238평을 매입해 고구마를 원료로 한 무수주정공장을 착공, 1943년에 완공했다. 1943년 제주도 내에는 고구마와 관련된 제조업은 무수주정공장 1곳, 전분 공장 5곳, 술 제조공장 11곳이었고, 통조림공장과 단추공장 등이 있었으나 대부분 일본인이 경영했다. 알코올과 통조림, 단추는 태평양전쟁의 군수물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해방이 되면서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적산 공장을 우리의 손으로 경영했으나 기술의 미숙, 자본의 부족, 판로난의 부재 때문에 현상 유지조차 어려운 실정이 됐다. 그렇지만 1950년 후반부터는 한국전쟁의 여파로 인해 알코올과 전분의 소모량이 늘어나면서 고구마를 원료로 하는 전분 공장이 많이 늘어났다. 당시 태평양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알코올을 공급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해방을 맞아 동양척식회사가 해산되면서 1945년 8월 18일 제주주정공장은 대한 신한공사가 적산으로 관리하다가 1946년 3월 17일에 다시 대한 신한공사가 해산됨에 따라 미군정 상공부로 이관됐고 이후 경남 관재국이 관리하고 있었다(제주연감, 1969).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7월 16일에 제주·성산·한림항을 통해 피난민 1만명이 쇄도하면서 제주 일대가 피난민으로 북적거렸다. 급기야 군대도 전열을 가다듬어 7월말 육군 제5훈련소(소장 김병호)가 주정 공장에서 창설됐다. 제1교육대는 모슬포, 제2교육대는 한림, 제3교육대는 제주주정공장, 제5교육대는 제주농업학교에서 훈련했다. 8월 9일에 제1차 소집령이 내려지고, 9월 1일, 수천에 달하는 제주도 청년들과 일부 피난민 청년들이 제5훈련소에 입대해 한 달 남짓 신병 훈련을 받고는 9월 21일 출소한 장정들이 1차로 전선에 투입됐다. 한편, 1951년 1월 주정공장은 경상남도 관재국으로부터 종업원의 명의로 개인이 불하받아 제주주정공장주식회사로 개칭할 수 있었다. 동년 3월 21일, 육군 제5훈련소는 재편돼 모슬포의 육군 제1 훈련소(소장 백인엽)로 통합되면서 창설됐다. 당시 모슬포 제1훈련소 군인들은 매일 아침 모슬봉 동쪽 병영에서부터 하모리 신영물까지 구보를 했는데 신영물에는 군인들에게 삶은 고구마를 팔려는 동네 소년들이 여러 명 있었다. 

그러나 불하 받은 제주주정공장주식회사는 전쟁기에 필요한 알코올을 생산해야 했지만, 주정 원료를 확보하는 것이 어려워 만 2년 동안 가동을 못하다가 1953년 2월 26일, 급기야 주정 원료를 싣고 대만의 무역선이 처음 산지항에 입항했다. 외국 무역 선박으로는 처음 제주에 온 것이다. 제주주정공장주식회사는 천신만고 끝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1953년 5월 3일에 드디어 정상으로 가동할 수 있었다. 

△고구마와 5·16 군사정부      

전쟁기에 고구마는 주로 식량으로 소비됐으나 5·16 군사정권이 당밀 수입을 막고 절간고구마를 주정 원료로 대체한 후부터는 갑자기 제주도 경제작물로 주목받으면서 재배 면적이 매년 3000~4000 정보씩 늘어났다. 1964년도에는 총생산량이 3300만관이나 돼 주장원료와 전분 원료로 공급했다. 고구마는 제주도 농가 호당 1만5000원 이상의 수입을 가져다주어, 새로운 환금작물로 떠올랐다. 1964년 제주도 고구마 재배 면적은 1만1834㏊로 생산량은 112만8760t(1964년 제주도 농무부)이었다. 당시 고구마 주요 품종으로는 충승 100호이며, 주산지는 남제주군(현 서귀포시) 서부와 한경면(현 제주시) 일대였고, 전분 공장은 60여곳에 이르렀고, 제주주정공장주식회사는 일찍부터 제반 처리시설과 양조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 제주도에서 재배되는 고구마는 공업연료나 가축 사료에서 많은 수확을 보이는 품종으로 천미, 유심, 수원 117호, 충승 100호 종이 좋았으며, 가정의 부식이나 식용으로 알맞은 것은 호국종이었다(우락기, 1978).  

한동안 고구마는 제주도 황금시대가 열리고 있었으나 절간고구마가 사양길로 접어들고 중국 전분의 수입되면서 제주도 농가에 타격을 받았으며, 또 환경문제로 인해 전분 공장도 사라지면서 고구마를 재배하는 농가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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