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우가 현실이 되었을 때 "어처구니 없다"는 말을 한다. 어처구니는 방아의 일부 또는 기와 끝에 액막이처럼 세워진 토우를 일컫는다. '어처구니'는 '없다'와 합쳐져 아주 중요한 것을 잊거나 잃어버려 일을 그르치거나 힘을 못 쓰게 되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내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여행 중에 기우가 현실이 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소매치기를 당한 것이다. 바로 1분 전에 절대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던 일이 바로 1분 뒤에 발생하니 어처구니가 없어 힘이 빠져버렸다. 재현한다는 것도 불길하니 그 일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하진 않겠다. 

이탈리아는 어딜 가도 공간이 예술이다. 천년만년 그대로일 것 같은 웅장함 속에 아기자기한 미술의 다양한 화법이 거의 모든 건물에 새겨져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중에 가장 매력을 끈 일은 공연장 입구가 어김없이 서점으로 꾸며져 있다는 것이다. 'ODEON'이라는 공연장인데 서점, 영화관, 극장, 카페가 함께 운영되는 문화예술공간이다. 두 군데 공연장을 들렀는데 두 군데 다 그런 걸 보니 이곳 이탈리아 피렌체의 특성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공간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남다르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된 이탈리아 여행이다. 물론 이러한 숭고한 화려함 속에 소매치기 일등국이라는 혐오의 딱지가 붙어 있다는 게 웃프기도 하다. 그야말로 마스께라Maschera, 이탈리아 말로서 가면(假面), 얼굴이라는 뜻)다. 이럴 때 제주 사람은 "메시께라"라고 말한다. 영화 '패팅턴'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Now, watch out. There are thieves, murderers and pickpockets on every platform. So follow us and do exactly as you're told." 모든 플랫폼에 도둑, 살인자, 소매치기가 잔뜩 있으니 이제부터 조심해야 한다고 당부하는 말이다. 무조건 잘 따라오고, 정확하게 시키는 대로 하라고. 그럼 나는 정확히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아서 벌을 받은 건가.

당신은 먼 곳에서 왔다
아주 먼 곳에서
빛과 향기 충만한 곳에서
그대는 지금 나를 조각배에 앉혔다
상아와 구름, 수정으로 만든 배
내마음을 치유해줄 희망을 나에게 보내 달라
시와 감동이 넘치는 도시로

그대는 별의 길로 나를 이끈다
별보다 높이 나를 앉힌다
보라
내가 별에 불타는 것을
입술 가득 별이 넘쳐나 나는 열에 들뜬다
순진한 금붕어들처럼
밤의 심연 속에서 나는 별을 줍는 사람이 되었다
그전에는 우리의 땅이 하늘의 이 푸른 누각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던가
이제 또다시 내 귀에 들려온다
그대의 소리가
(포루그 파로흐자드 시, '태양은 떠오른다' 부분)

배낭 가방 속에 들어 있던 작은가방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일은 불가사의다. 그 속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을 잃은 밤에 나를 치유해줄 시 한 편이 필요했다. 여권보다 더 중요하고, 유로보다 더 큰 힘을 가진 건 무엇일까. 저녁에 참여한 합창제에서 남성 중창단의 반주 없는 노래를 들었을 때 아주 큰 위로가 되었다. 물론 공연이 끝나고 문밖을 나온 순간 먹빛 구름과 유난히 거센 바람은 나를 우울하게 했다. 어쩌면 커피 한 잔 사 마실 한 푼의 현금도 없다는 게 나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자전거를 도둑맞은 안토니오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래서 희망이 절실하게 필요했을까.
루이지 바르톨리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체자레 자바티니 시나리오를 영화로 만든 '자전거 도둑'은 가난한 가족의 서글픈 서사를 다루고 있는 작품 중 오래 기억에 남는 작품 중 하나다. 봉준호 감독에게도 영화를 주었다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를 대표하는 명화다.

세계2차대전의 패전국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의 거리에서 안토니오(람베르토 마지오라니 역)는 직업소개소를 통해 거리에서 벽보를 붙이는 일을 맡는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선 자전거가 필요하다. 안토니오의 아내 마리아는 침대 시트를 전당포에 맡겨서 자전거를 구한다. 일자리를 구하게 되었다는 것은 가족 모두에게는 희망이며 기쁨이었다. 하지만 안토니오가 출근하여 벽보를 붙이는 사이 한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도망친다.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고, 사방팔방으로 자전거를 찾아 나선 안토니오와 그의 아들 브루노(엔조 스타이올라 역)는 거리에 앉아 서로를 바라본다. 그리고 축구장 밖 자전거 대열 속에서 하나의 자전거에 시선이 머문다. 안토니오는 아들 브루노에게 빨리 집으로 가라고 한다.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은 "생은 아름답지만은 않지만 가치는 있다"고 말한다. 글쎄, 이 시를 읽고도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삶은 보리 고두밥이 있었네.
달라붙던 쉬파리들 있었네.
한줌 물고 우물거리던 아이도 있었네.
저녁마다 미주알을 우겨넣던 잿간
퍼런 쑥국과 흙내나는 된장이 있었네.
저녁 아궁이 앞에는 어둑한 한숨이 있었네.
괴어오르던 회충과 빈 놋숟가락과 무 장다리의
노란 봄날이 있었네.
자루 빠진 과도와 병뚜껑 빠꿈살이 몇 개가 울 밑에 숨겨져 있었네.

어른들은 물을 떠서
꿀럭꿀럭 마셨네.
아이들도 물을 떠서 꼴깍꼴깍 마셨네.
보릿고개 바가지 바닥
봄날의 물그림자가 보석 같았네.
밤마다 오줌을 쌌네 죽고 싶었네.
그때 이미 아이는 반은 늙었네.
(김사인의 시 「가난은 사람을 늙게 한다」 전문)

이미 반은 늙어버린 아이를 상상하는 것처럼 마음 아픈 일도 없다. 아이의 이마에 새겨진 주름을 쳐다보는 일은 쉽지 않다. 때 낀 손톱은 차라리 안아주고 싶다. 나이보다 두 배는 늙어버린 아이, 그 두 배의 고통을 어떻게 안아 줄 수 있을까. 햇살론이 실패한 정책이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렇다면 동심의 이마를 부드럽게 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비, 바람, 햇살, 구름, 그리고 일곱 빛깔 무지개. 조수에 카르두치(Giosue Carducci)의 말을 믿고 싶다. Il dolore rende nobili, non lo dimenticare. 고통은 우리를 고귀하게 만들어, 그걸 잊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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