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제주도 27. 잠녀와 해녀의 용어 <2>

강화도조약 후 해양침탈  
일본 나잠, 섬에서 성행
세계화 문제 언어의 교란 

△나잠(裸潛)이라는 언어의 역사적 배경

나잠이라는 말은 일본인이 처음 사용한 말이다. 강화도 조약 이후 19세기 말에 나잠업이라고 하여 한반도 남해안과 제주도를 중심으로 일본인 잠수기 어업과 함께 등장한 말이다. 나잠은 일본이 일제강점기 이전 조선의 바다를 식민지를 위한 보물창고로 여겨 일본의 서쪽에 있는 바다를 정원으로 삼아 강제 조약을 맺게 하여 조선 해양 침탈 때 용어로 썼다. 

나잠업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산업혁명으로 기반을 잡은 일본이 19세기 말 자신의 바다가 황폐해지자 황금어장이었던 남해와 제주도 바다에 눈독을 들이고 강제 침탈한 일본인 어부들의 작업방식이었다. 나잠은 우리가 흔히 아마(あま)라고 부르는 '해녀라는 말'의 기능을 표현한 말로, 정확히 아마(あま)라고 하면 남자를 해사(海士), 여자를 해녀(海女)라고 불렀다. 나잠은 이들 남녀 아마를 부르는 사람들의 잠수 활동이었다. 용어는 말이 쓰이는 기능에 의해서 의미와 개념이 결정된다. 일본인 아마들은 전복을 따기 위해 남해안 섬들을 겨냥하여 부산을 통해 들어와 우도, 비양도, 그리고 가파도를 중심으로 잠수기 어업과 나잠업을 병행했던 것이며, 당시 9세기 말 20세기 초 그들이 나가사키로부터 가져온 감자를 식량으로 삼아 비양도와 우도, 가파도에 살면서 어획 창고를 짓고 그곳의 해산물을 마구 잡았다. 일본인 나잠업자들은 급하게 도망을 가거나 주민들을 침탈해야 하는 해외의 위험을 무릅쓰는 특성으로 인해 주로 남성 아마(海士)들이 국외로 나왔다.

따라서 나잠은 잠수기 어업과 더불어 철저히 우리를 괴롭혔던 침략과 치욕스러운 역사 용어였다. 모슬포 5좌수 사건은 가파도에 똬리를 틀고 모슬포 신영물로 상륙한 일본인 나잠업, 잠수업자들의 약탈 만행사건은 300여 년 전 제주를 한 때 공포로 몰아넣었던 1552년 천미포왜변과 1555년 을묘왜변의 역사적인 반복이었다.     

△적신노출과 나잠 

17세기 잠녀를 보면서 기겁을 한 유배인 이건은 조선의 왕실 양반이었다. 그는 잠녀들이 남자들과 작업하는 광경을 보고 '적신노출(赤身露出)'이라는 말로 놀라움을 표현했다. "어머나 세상에!" 알몸을 드러내면서 일하는 여성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유교의 강상 윤리가 바로 "에이 상것들"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누구 때문인가. 원래 조선에서는 전복을 따는 사람을 포작인이라고 불렀고, 미역을 따는 여성을 잠녀라 불렀다. 포작인 바다의 전복을 따서 진상품을 만들고, 또 그 진상품을 양반과 왕실을 먹이기 위해 곁꾼이 돼 배송하는 일까지 담당했다. 전복을 따는 일도 어려운데 바다를 건너는 일은 더욱 힘들어 17세기 말 표류와 도망으로 남성 포작인의 수가 줄어들면서 미역 따는 여성 중에 튼실하고 잠수를 잘하는 잠녀를 선별하여 전복 따는 일을 병행케 했다. 

사실 잠녀는 소중의를 입어서 알몸이 아니었고, 소중의는 어깨와 다리가 드러나는 기능적인 수영복에 불과했다. 긴 소매나 바지를 입으면 옷이 몸에 끼어서 손발이 자유롭지 못해서 잠수를 할 수가 없다. 멀리서 보니 물에 젖에서 햇볕에 타 벌겋게 된 몸이 마치 알몸[赤身]으로 보여 양반이 지레 놀란 것이었다. 

나잠(裸潛) 또한 '벗은 몸이'라는 말이다. 잠수의 기능상 최소한의 옷만을 입고 작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잠이라는 용어가 일본인 남녀 아마들이 사용했던 작업용어인 만큼, 한 용어에 남녀 성별을 동시에 병행해 쓰는 것이 다르다. 조선에서는 포작인=전복 따는 남성, 잠녀=미역 따는 여성이 하다가 어쩔 수 업이 17세기 말이 되면 잠녀=미역과 전복을 따는 여성으로 강제로 직능이 확대되었다. 일본에서는 아마=남성은 해사(海士), 여성은 해녀(海女)라고 불렀다. 

△해처(海妻)와 해녀(海女)

잠녀의 다른 말로 '해처(海妻)'라는 말이 있다. "해처는 치마를 입지 않고 한 자쯤 되는 천으로 몸을 가렸다(海妻無裙布繫一尺)" 17세기 허목의 「미수기언」에 나오는 말이다. 당시 제주 여성들은 남자들이 적어서 남자가 하던 힘든 일을 여성들이 하므로 여자 장정이라고 하여 '여정(女丁)'이라 불렀다. 

그렇다면 해녀라는 말은 우리나라 문헌에서 언제부터 등장하는 것일까? 해녀는 1791년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 1727~1798)가 쓴 「존재전서」 「금당도선유기(金塘島船遊記)」에 '해녀가 전복을 딴다(海女採鰒)'라는 말이 나오며, 또한 「조선왕조실록」 숙종 40년(1714) 8월 "왜관(倭館) 관문 앞에 매일 아침 촌가의 부녀자들과 해녀(海女)들은 채소와 생선을 가지고 와서 시장에서 서로 사고팔고 있었다" 라는 기록이 있다. 해녀라는 용어가 지식인의 생각과 왜관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해(海)는 모든 하천이 흘러 들어가는 곳인 바다를 말하며, 여자는 그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이니 해녀가 하는 일로 너무 광범위하다. 해녀라고 하면 바다의 신녀, 곧, 해신(海神)의 딸이 될 수도 있고, 헤엄을 못 쳐 걸어 다니면서 조개를 잡거나 얕은 물에서 해초를 건지는 여자로 말할 수도 있다. 아니면 어부의 아내를 포녀(浦女)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러나 잠녀는 직능이 매우 분명하여 오로지 호흡을 참고 물속에 잠기는 여성을 말한다. 

해녀라는 말은 메이지 유신 이후 구한말의 기록들과 일제강점기가 되면 일본인 학자, 기자, 문필가, 조선의 미술인과 문인들까지 마치 합세하여 유행을 퍼뜨리듯이 주객이 전도되는 양상을 보인다. 해녀라는 말은 7~8세기 무렵에 편찬된 일본의 시가집 「만요슈(萬葉集)」에 보이며, 1906년 신호(神戶)신보, 1908년 대판매일신문의 보도를 비롯하여 일제강점기에서 해방 전까지 일본인들이 기사나 기고문에 대거 '해녀라는 말을 쓰고 있다. 또 조선총독부의 촉탁 연구자들 모두가 해녀라 하고 있고, 일본의 조선 유학생에 의해서도 해녀라는 말이 쓰이면서, 해방 후 대학 연구자들에게 용어가 전수되었다. 

1923년 발행된 「미개(未開)의 보고(寶庫)」에 나잠과 해녀가 나오며, 지리학자 마수다 이치지(桀田一二)가 "제주 해녀(海女)의 출가지로 "가장 오래된 곳은 도쿄부(東京府) 미야케지마(三宅島)로 메이지 36년(1903) 김녕의 사공 김병선(金丙先) 씨가 해녀 여러 명을 데리고 출가한 것이 시초"라고 했으며,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인 총독부 필자들이나 일본의 기자, 동아일보 등 한국의 신문에서도 '해녀'라는 말이 자주 등장했다. 총독부의 내지(일본) 동화정책에서 언어와  제도의 집행은 매우 중요했다. 창씨개명이 대표적인 예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잠녀들의 조합도 해녀조합으로 명명 되었고, 잠녀들이 벌인 항일운동도 해녀항일투쟁으로 신문에 보도되었다.    사실상 일제강점기에 식민지 자본주의가 진행되면서 "돈이 의식을 결정해버렸다" 해방 후 이런 돈의 힘은 언제라도 언어를 쉽게 바꿔버리는, 장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팔아버리는 편한 관념이 자리잡게 되었다.   

지금은 해녀라는 말이 익숙해버려 신문, 잡지 등 인쇄 매체에 의해 난립되면서 예술인, 사전집필자, 번역자들의 시각도 잠녀라는 말을 해녀라는 말로 쓰여서 우리말로 느껴지게 되었다. 1971년 제주도에서 관광을 위해서 잠녀라는 어감이 마치 '잡녀(雜女)'처럼 상스럽게 들린다는 평가로 인해, '해녀'라는 용어를 공식 채택하므로써 잠녀에 대한 파생어에 교란이 일어나고 있다. 잠녀와 관계된 여러 단어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가장 큰 폐해는 제주 잠녀라는 고유한  말이, 일본 해녀(あま)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공동 등재됨으로써 세계인이 볼 때 일제 식민지였던 한국이 일본에게 배워 제주도 해녀가 된 것으로 착각한다. 언어의 힘이 이렇게도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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