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는 이마다 몸에 돌덩이를 매달고 있는 것처럼 심신이 무겁다고 한다. 벚꽃이 만개한 걸 보고서야 봄이 되었음을 알아차린다. 알아차리든 말든 자연은 재 할 일을 하고 있건만 사람만 제 자리에서 서성거리며 한 발짝도 못 나아가고 있다.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바라보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룰렛을 돌렸을 때 어떤 숫자가 나올까 기다리는 초조함이라고나 할까. 이것도 저것도 비유가 마땅하지만 그처럼 불안하다는 뜻일 게다. 모두가 그럴 리는 없지만 내가 그러니 남들도 다 그런 것만 같다.
잠시라도 무거움을 덜어낼 겸 미술관을 찾았더니 돌덩이가 매달려 있는 상징물이 문 앞에서 자꾸 서성거리게 한다. 수면 가까이 맞닿았다고 생각한 형상이 집에 와 꺼내 보니 지상에 매달려 있는 듯, 바다 깊이 빠져 있는 듯하다. 햇빛에 반사된 그림자가 만들어낸 또 다른 이미지에 감탄하게 된다. 이게 설치예술이지 싶다. 그건 그렇고, 기다리고 기다리는 봄편지는 언제 오냐구요?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가 빨리 내려지길 간절히 바란다. TV 앞에 앉은 어머니도 인용이든 기각이든 빨리 내려야 살 것 같다고 한다. 의외의 말에 왜냐고 물었더니, "대통령이여 산불이여 도채비추룩 나산 소뭇 저것 보민 전쟁날 거 닮다"고 한다. 뭐가 뭔지 모르지만 시국이 불안한 것이다. 4·3을 몸소 겪은 어른이라면 느낄만한 트라우마의 재현이다.
한 시대의 악이
한 인물에 집중되어 있던 시절의 저항은
얼마나 괴롭고 행복한 시대였던가
한 시대의 악이
한 계급에 집약되어 있던 시절의 투쟁은
얼마나 힘겹고 다행인 시대였던가
고통의 뿌리가 환히 보여
선과 악이 자명하던 시절의 자기결단은
얼마나 슬프고 충만한 시대였던가
세계의 악이 공기처럼 떠다니는 시대
선악의 경계가 증발되어버린 시대
더 나쁜 악과 덜 나쁜 악이 경쟁하는 시대
합법화된 민주화 시대의 저항은 얼마나 무기력한가
구조화된 삶의 고통이 전 지구에 걸쳐
정교한 시스템으로 일상에 연결되어 작동되는
이 '풍요로운 가난'의 시대에는
나 하나 지키는 것조차 얼마나 지난한 싸움인가
옳음도 거짓도 다수결로 작동되는 시대
진리는 누구의 말에서나 반짝이지만
그것을 살고 실천할 주체가 증발되어버린 시대
혁명의 전위마저 씨가 말라가는
이 고독한 저항의 시대는
(박노해 시 「시대 고독」 전문)
"한 시대의 악이 한 인물에 집중되어 있던 시절"은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산 하나 치우는 건 그리 쉽게도 하더니 악 하나 물리치는 건 헤아릴 수 없는 목숨과 사회적 비용을 부담해야 했다. 몇 명이 죽고, 몇 명이 갇히고 그런 걸 얘기하는 게 아니다.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은 부모의 불안이 응축된 숨소리를 들어야 했고, 산과 들에서 운동장에서 뛰어놀고 싶은 아이는 부모의 한을 풀어줘야 하듯이 머리 쥐어박히며 책상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것 뿐인가. 어떤 아이는 불에 타 죽고, 어떤 아이는 배곯아 죽고, 어떤 아이는 아버지에게 겁탈당했다. 이 모든 것은 영화 속의 일처럼 가십거리로만 존재한 진실이다.
아무도 보지 않는 사각지대에 놓인 어린이, 여성, 노인, 장애인, 비정규직 노동자, 농민…, 그들의 목소리는 다성의 굉음에 묻혀 한 번도 대접받지 못했다.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을 매일 해야 되는 사람의 가슴을 헤아려본 적 있는가? 고독한 침묵이란 이런 것이다. 아무도 목소리를 듣지 않기에 스스로 고립을 선택하고, 아무도 인생을 책임져 주지 않기에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리라 마음먹은 선택들. 그것은 삶으로 나아가는 길이 되기도 했지만 범죄자가 되는 길이기도 했다. 모든 범죄를 선한 의지의 발현이라며 퉁치자는게 아니다. 때로는 살고자, 때로는 최선이기에 선택한 선한의지의 정당방위도 있다는 것이다.
한지민이라는 배우를 새롭게 본 건 이 영화 때문이다. 이지원 감독의 영화 '미쓰백'은 1988년 서울의 철거된 쪽방촌 골목을 연상케 한다. 올림픽 성화봉송을 이유로, 외국인 보기에 창피하다는 이유로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야 했던 시민들, 그들의 목소리는 포크레인 소리에 짓눌려 한번도 제대로 보상받지 못했다. 숱하게 있었던 알 수 없는 화재와 느닷없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은 전국민을 경악케했지만 이에 대한 정확한 원인규명과 위로의 제의식은 없었다. 어느 국회의원 말마따나 "1년 지나면 다 잊혀질 이야기"가 돼버린 거다.
영화 '미쓰백'은 삶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배반당한 두 여성의 이야기다. 폭력과 방치로 인해 어린 나이에 전과자가 돼버린 백상아(한지민 역)와 폭력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한 지은(김시아 역)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는 닮았다는 것을 직감한다. 고통의 연대는 희망의 연대보다 무섭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매 순간 날 배신하는 게 인생이야"를 되뇌던 상아는 작고 깡마르고 얼어붙은 지은을 만나 "이런 나라도, 같이 갈래?"라고 묻는다. 지은의 '말 없는 말'에 공감하며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행동하겠다는 표현이다. 지은이로서는 힘쎈 언니가 나타나 준 것이며 어쩌면 처음으로 배반하지 않는 어른을 만나게 된 셈이다. 경찰도, 사회복지사도 하지 않은 일 그것은 법을 넘어선 고통의 연대다. 내 고통을 누가 함께 짊어지겠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의 환희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에밀리 디킨슨은 이렇게 썼다. "새벽이 언제 올지 몰라, 문을 모조리 연다, 새벽은 새처럼 깃털을 가졌을까. 혹은 해변처럼 파도가 칠까-". 그래서 "내가 할 일은-바로 이것-조그마한 손을 쫙 펴 천국을 모으는 것-"이라고. 새벽은 언제 올지 모르지만 조그마한 손은 쫙 펴서 깃털처럼 가벼운 봄편지 받아보았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