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제주도 32. 일본 어민의 모슬포 상륙 

상어 지느러미만 청나라 수출
도미 귀한 줄 모르는 조선인
일본 어민 모슬포 살인 만행 

△남해로 몰려드는 일본어선들

1886년 일본 어민들은 어선 220척을 이끌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연안 지역을 침탈하여, 일본인들이 선호하는 도미와 상어와 전복을 잡았는데 1년 동안에 잡은 어업 수익은 무려 20만원이었고, 경비 4만원을 빼며는 16만원의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1882년 재조선국일본인민통상장정이 체결된 지 4년 되는 시점이었다. 일본 어민들은 특히 상어를 잡으면 지느러미만떼어내어 중국 요리 재료로 수출하려고 지느러미 이외의 부위는 바다로 버리다가, 의외로 조선인들이 상어고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안 후에는 상어를 가까운 바다에서 잡아 조선인들에게 팔았다, 조선인들은 이를 매우 좋아했다. 도미는 지금은 귀한 고기로 대접받고 있지만 당시 조선에서 도미는 흔했지만, 일본에서처럼 귀하게 대접받지 못해서 싸게 취급되었다. 

1886년 일본어선들의 선적지와 배의 규모를 보면, 야마구치현 80척, 야마구치현 구나 20척, 야마구치현 오케이 노야 10척, 야마구치현 요시시게 40척, 야마구치현 사고 5척, 야마구치현 야스오카 우라 6척, 야마구치현 우마시자 2척, 오이타현 사가 10척, 오이타현 우스키 2척, 에히메현 10척, 구마모토현 우시부카 4척, 시마네현 한노우라 4척, 부산항정계 25척 등 모두 218척이었다. 이들 배들이 잡은 물고기로는 도미와 상어가 주류를 이루었지만 잡어, 청어 등도 함께 잡았다. 승선 인원은 거의 4~5명이었고, 몇 척은 6명까지 승선하기도 했다. 어로장소로는 경상도와 전라도가 주류를 이루었고, 간혹 부산 근해와 동해까지도 있었다(한국근대사자료집성, 2002). 

일본에서는 잡은 어획량을 보고 조선의 바다가 풍요롭다고 소문이나면서 여러 촌이 연합하여 수십 척의 어선단을 조직하거나 점점 어선을 늘여서 조선 남해를 침탈하였다. 일본 어민들이 선호하는 섬은 추자도와 소안도였다. 추자도와 소안도, 진도 사이는 우뭇가사리와 청각 등 해초가 무성하여 해초를 먹고 사는 물고기와 어패류들이 수두룩했다. 그 가운데에서도 중요한 어종으로 도미, 멸치, 청어, 오징어, 전복, 돌고래, 상어를 선호했다. 상어는 대부분 값이 좋은 백상아리였고, 그 다음으로 지느러미 끝에 작고 검은 띠가 있는 군흑 상어를 잡았다(이근우 외, 2008). 

△잘못된 부당한 손해배상 

1886년 11월 13일 독판교섭통상사무 김윤식은 일본 공사 스기무라에게 한 통의 공문을 보냈다. 일본 잠수기회사 사장 후루야 리쇼가 제주목사 심원택이 어채를 못하게 한 것에 대한 손해배상 고발 건에 대한 회신이었다. 그 회신에는 제주 어채에 관한 협약서를 첨부하고 있는데 후루야 리쇼와 제주 어채에 대한 협약은 이러했다. 

"조선 정부는 일본인 잠수기회사 사장 후루야 리쇼가 제주목사(심원택)가 어채를 못하게 막은 것으로 인해 발생한 손해를 배상해 줄 것을 요구한 사안을 타결하기 위해 상호간의 협의를 거쳐 이하의 각 조항을 약정하여 수립한다.

하나, 조선정부가 고용한 것으로 간주하여 후루야 리쇼는 양력으로 내년 3월부터 6개월 동안 어선 14척으로 제주 연해에서 마음대로 어채하도록 한다. 단, 해당 지역 연안의 부녀자들이 물질하고 있는 곳은 되도록 피하여 혼잡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나, 조일 양국 간의 약조를 수립하게 되어 어세를 징수하게 될 경우, 조선 정부는 징세를 시행하는 날로부터 5년 동안 특별히 후루야의 어선 14척에 대한 세금을 면제해 주도록 한다.

하나, 조선 정부는 금 6600원을 후루야 리쇼에게 배상해 주도록 하되, 그중 3000원은 내년 양력 3월까지 배상해 주도록 한다. 

하나, 남은 금액 3600원은 5년을 기한으로 메이지 21년(1888)부터 매년 3월에 1200원을 배상해 주도록 한다. 

하나, 배상금의 지급이 연기될 경우 100원당 월 이자 1원을 지급한다. 이상의 내용을 확약하고 각자 각자 한 장씩 나누어 가질 것. 1886년 11월 11일 대조선국 독판교섭통상사무 김윤식  인, 일본 메이지 19년(1886) 12월 6일 대일본국 나가사키현 잠수기회사 사장 후루야 리쇼 인." 

이 협약서를 보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그야말로 망해가는 왕조의 기운이 진하게 감지된다. 자신의 바다에서 어채 남획이 벌어지고, 또, 모슬포에서 약탈하고 주민을 살해까지 한 일본 어민들의 해적질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제주목사에게 거꾸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행동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파렴치한 행동이었다.  

당시 제주목사 심원택의 장계 내용을 보면, 가파도에서 전복을 따던 일본 배 6척이 모슬포에 와서 정박하고 일본 선원들이 제멋대로 상륙하여 촌락에 뛰어 들어와서는 닭, 돼지를 약탈했고 칼을 빼들고 집주인 이만송을 쳐서 그 자리에서 죽게 했으며, 본 모슬포 백성들인 김성만, 정종무, 이흥복 등도 구타를 당했다. 일본 배에 탔던 40여 명이 달려 나와서 모슬포의 기찰장 문재욱을 위협하여 강제로 화해의 증표를 받아내고는 즉시 그 섬(가파도)으로 돌아갔다."닭과 돼지를 노략질한 것도 지극히 도리에 어긋나는 것인데 칼을 뽑아 들고 사람을 찔렀으니 이것이 얼마나 고약한 버릇입니까." 목숨을 배상하는 문제는 원래 공법에 있으니 교섭아문으로 하여금 일본 공사와 협상하여 빨리 합당하게 마무리 짓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 일본어민의 모슬포 침탈 사건은 살인을 저지른 일본 도민에게 배상책임을 돌리지 않고 오히러 제주목사 심원택의 어채 금지 사건으로 둔갑돼 조선정부가 배상금을 물어줘야 하는 외교가 실패한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조선 외교책임자 제주 유배인 김윤식    

이 사건의 교섭아문인 독판교섭통상사무 김윤식(1835~1922)은 서울 출신으로 본관은 청풍. 자는 순경, 호는 운양이며, 제주도 유배인이다. 아버지는 증이조판서와 좌찬성을 지낸 김익태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이다. 그의 문인으로는 유신환,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가 있고, 또 제주인 홍종시가 그와 교유한 인물이다. 조선은 청나라의 권고로 영선사 김윤식과 함께 양반출신 학도 20명, 기술자 18명을 인솔하고 청나라에 가서 텐진기기국에서 신식무기 제조법과 군사관계 기초과학 등을 배울 예정이었으나 정부의 재정적 뒷받침이 부족하고 학도들의 기본 지식 부족으로 곧 귀국하고 말았다. 한편, 김윤식은 청나라 이홍장의 자문을 받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지만 역시나 조일수호조약처럼 불평등조약이라는 인상을 지우지는 못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김홍집, 김만식과 함께 우창장 부대와 청년장교 위안스카이, 김윤식, 어윤중이 동행하여 대원군을 군란의 책임자로 몰아 텐진으로 납치하는 일에 가담했다. 정변 이후 김윤식은 병조판서를 거쳐 독판교섭통상사무가 되어 대외 관계를 담당하였다. 김윤식은 갑오개혁의 입안자로 참여하는 한편, 그럼으로써 일본에 의해 국권이 잠식당하는 굴욕적인 모든 조약이나 조처에 순응하였다. 1896년 양력 2월 아관파천 사건이 일어나자 외무대신직에서 물러나 을미사변으로 탄핵을 받아 1898년 1월 제주목으로 종신 유배형에 처해졌는데 1901년 신축년에 제주도민들의 민중항쟁이 일어나자 같은 해 6월 다시 급히 지도로 이배되었다. 이때 김윤식은 장두 이재수의 민중항쟁 현장을 생생히 지켜보았다. 저서로는 「속음청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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