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한 번 크게 불더니 벚꽃잎이 거의 지고 말았다. 꽃잎 진 자리가 붉다. 내 손가락에 생채기가 난 것처럼 아프다. 무엇이 있던 자리가 비워지는 것은 어쩐지 스산하다. 하지만 그 자리에 열매가 달린다는 것을 안다면 기죽을 일도 아닌데 말이다. 꽃 하나 피고 지는 것에 마음이 뒤숭숭한다는 것은 사치일 수 있으나 누군가에겐 가슴 한 귀퉁이 베인 듯한 아림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이에게 마음을 의지하고 살던 나무 하나가 베어진다는 것은 산 하나가 무너지는 것 같은 아픔일 것이다. 

고승욱 개인전 '어떤 이야기'에서 제성마을 왕벚나무 살리기 운동에 참여했던 영상을 보았다. 1941년 알뜨르비행장이 건설되면서 신사수동에 살던 주민들이 제성마을로 이주해오면서 기념으로 심은 나무가 왕벚나무였다. 그런데 제주시에서 도로확장 명분으로 왕벚나무 12그루를 베어버린 것이다. 이 사실을 안 주민들과 시민들은 이에 항의하며 분노를 터뜨렸고, 일부 주민들은 베어낸 왕벚나무 밑동에서 올라온 새싹과 가지를 잘라 심었다. 대부분 살지 못했고, 그 중에 하나가 싹을 틔우고 새잎이 무성하게 자랐다고 한다. 지금쯤 그 나무는 얼마나 자랐을까 궁금하다. 

앞으로 늙은 곰은 동면에서 깨어나도 동굴 밖으로
나가지 않으리라 결심했는기라
동굴에서 발톱이나 깎으며 뒹굴다가
여생을 마치기로 했는기라

그런데 또 몸이 근질거리는기라
등이며 어깨며 발긋발긋해지는기라
그때 문득 등 비비며 놀던 산벚나무가 생각나는기라

그때 그게 우리 눈에 딱, 걸렸는기라
서로 가려운 곳 긁어주고 등 비비며 놀다 들킨 것이 부끄러운지
곰은 산벚나무 뒤로 숨고 산벚나무는 곰 뒤로 숨어
그 풍경이 산벚나무인지 곰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

우리는 한동안 산행을 멈추고 바라보았는기라
중동이 썩어 꺾인 늙은 산벚나무가
곰 발바닥처럼 뭉특하게 남아있는 가지에 꽃을 피워
우리 앞에 내미는기라
(송찬호 시 「늙은 왕벚나무」 전문)

제성마을 사람들에겐 마을의 왕벚나무가 "등 비비며 놀던 산벚나무"일 것이다. 세 차례나 있었던 이주의 슬픔을 왕벚나무에 고하면서 허허벌판 같은 가슴을 달래었을 것이다. 나무 하나 베는 게 무슨 대수냐고 물으면, "넌 사랑을 아니?"라고 반문할 수밖에 없다. "그런 대답은 너무 감상적이지 않아?"라고 되물으면 "산다는 게 이성만으로 이루어진 게 뭐가 있니"라며 혀를 끌끌 찰 것이다. 어린 날, 할망당에 다녀오시는 어머니의 낯빛에서 본 신령스러운 기운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 그날만은 머릿수건을 벗을 때도 뭔가 다 비운 듯한 고요함이 느껴졌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정령을 믿으며 그 힘에 의지해 선량함을 지켜온 이들의 힘은 그런 데서 느껴진다. 손에 촛불을 들지 않았어도 마음으로 촛불을 켜는 그런 거 말이다. 

이 계절이면 생각나는 영화가 '앙:단팥 인생 이야기'이다. 어느 블로거가 동일 제목을 달았던데, 뭔가 쓸쓸한데 따뜻하다. 단팥빵 '도라야키' 명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랑에 관한 영화다. 장사가 잘 안되는 도라야키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도쿠에(키키 키린 역)는 단팥빵의 맛을 제대로 낼 줄 아는 장인이다. 그녀로 인해 가게는 성황을 이루고 오랜만에 생기를 얻게 되는데 그녀가 살려낸 건 가게라기보다는 우울에 빠져 있던 사장 센타로(나가세 마사토시 역)와 와카나(우치다 카라 역)라는 소녀이다. 그들은 삶에 치이고 세상에 다쳐서 혼자라는 생각에 갇힌 존재들이다. 도쿠에는 말한다. "우리는 이 세상을 보기 위해서, 세상을 듣기 위해서 태어났어. 그러므로 특별한 무언가가 되지 못해도 우리는, 우리 각자는 살아갈 의미가 있는 존재야."라고. 

고승욱 작가의 사진 풍경 중에서 인상 깊게 본 제목이다. '말더듬'이라 해서 유심하게 살펴보았다. 누구일까? 왜 말을 더듬을까? 생각하면서. 마을 더듬는다는 것은 생물학적 조건을 제외하고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하고 싶은 말이 가슴 속에서만 웅얼거리고 있거나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순서가 꼬이면 말을 더듬게 된다. 언어를 통제당한 이들의 특성이기도 하다. 누가 누구에 의해서 언어가 통제당하는가. 그건 숱한 역사적 경험 속에서, 개인의 역사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아버지의 권위가 가족들을 숨막히게 하였고, 독재권력이 언론을 장악하여 민중의 눈과 귀를 막았다. 언론이 권력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고 양비론적 언어도단을 자행하는 예도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생각하는 건, 깨어있는 눈과 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특별한 무언가'가 되라고 강요하는 계몽의 언어도 심히 위험하다. 원래 존재는 다 다르고 특별하다. '특별하다'는 말이 위계적으로 들린다면 '고유하다'가 맞을 것이다. 그런데 힘의 언어는 특별하지 못하면 낙오자로 분류한다. 개발과 성장주의를 구호로 삼는 이 시대가 숱한 낙오자를 양산하고 말더듬이로 만들고 있다. 이게 맞는가? 느린 대답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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